▲배주영 선생 1주기에 경북지부에서는 그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은 유고집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를 냈다.
배주영선생추모사업회
전교조 창립 후, 학교에서 쫓겨나 고단한 해직 시기를 보낸 교사들 가운데 유명을 달리한 이들도 적지 않다. 배주영은 이듬해 2월에 해직자들이 첫 전교조장(葬)으로 배웅한 동료였다. 그날 궂은 눈비가 흩날렸던가. 배주영 세실리아는 온 나라에서 달려온 교사들의 애도 속에 안동 외곽의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열심히 살았다
1주기 때, 동료들은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길은 푸르른데>(푸른나무)를 펴내고, 그가 얼마나 좋은 교사가 되려고 애썼는가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해마다 기일이면 전교조 경북지부와 안동지회, 그리고 옛 동료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 옛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를 추모했다. 그런 세월이 30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30년은 한 세대를 가르는 시간이다. 그것은 1989년 8월 12일, 4년 6개월간의 교단생활을 마감하고 배주영이 두고 떠나온 청송종고 2학년 아이들을 마흔여덟 살의 장년으로 자라게 한 시간이다. 해임되어 학교를 떠나던 날, 그의 마음은 담담하고 차분했던 모양이다. 그날 치 일기에서 그는 그렇게 썼다.
삶과 생활의 기본원칙
① 비굴하지 말 것 : 어떤 일에도 치사한 감정이나 자신의 이익을 내세워 비겁해지지 말 것이며 의지를 굽히지 말자.
② 당당한 태도와 바른 생각을 가지도록 노력할 것 : 늘 생활을 정리․반성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고 상대에 대해 너그러울 것.
③ 공부―학습을 열심히 할 것.
그는 마음먹은 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해고자로 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배주영은 살아생전에 남긴 마지막 일기에서 자신의 번민을 토로하고, 헤어진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었다.
1990년 2월 3일 흙날
감정이 예민해지고 어려지는 요즘이다. 무슨 일에든 조그마한 자극만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 서럽고, 애틋하고, 그립고, 막막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철현이, 명수, 병화, 정보, 명호, 종석, 경보, 원섭이, 희식이, 정길이, 용신이, 종철이, 상년이, 영걸이, 철순이, 경자, 남숙, 남희, 현주, 명순, 미정, 또 미정이, 명숙이, 수경이, 경숙이, 미숙이, 순향이, 영이, 송자, 윤희, 춘연, 정화, 은화, 연수, 순이, 순영이, 경희, 은정, 또 은정이, 상정, 경미, 금순, 태순, 현주…….
모든 과거의 것들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허망하다. 그러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가정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 있을까……. 배주영이 살아 있으면 쉰일곱이 된다는 가정은 한 인간이 살았던 삶, 그 실존을 환기할 뿐이지 어떤 위로도 되지 않는다.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 님은 스물일곱 샛별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 님은 전교조의 새벽이었습니다. / 1990년대의 문을 여는
전교조의 첫새벽, 스물일곱이었습니다.
1990년 2월 19일 새벽, / 마침내 새벽을 온몸으로 열어놓고
그 새벽을 안고 눈을 감다니
- 정영상(1956~1993)의 추모 시 '님은 스물일곱이었습니다' 중에서
배주영을 보내면서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이 메었던 정영상도 갔다. 배주영이 가고 2년 뒤다. 경북의 해직 교사 105명 중에서 여덟 명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에 이어 1993년에 정영상이, 그리고 복직 후엔 황현자(1999), 지송월(2000), 정관(2004)이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다.
배주영의 부음을 전했던 장성녕(2008)도, 배주영 19주기에 무덤 앞 잡초를 뽑던 김창환(2013) 선생도 갔다. 2014년에는 인천으로 옮겨 활동하던 채희성도 떠났다. 심장마비와 암으로, 뇌졸중 등으로 세상을 떠난 이는 말이 없고 남은 동료의 가슴엔 회한만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