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선생 거주지에 붙어있는 현판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 李東寧 舊居遺址)
김경준
나는 이동녕 선생을 생각하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가 당신의 생애를 통해 오롯이 보여준 '쟁족(爭足: 누구나 다리가 되어 궂은 일, 힘든 일 마다하지 말자는 뜻)' 정신 때문이다.
이동녕 선생은 독립운동 경력으로 치면 김구 선생보다도 훨씬 선배였다. 선생은 일찍이 만주와 러시아를 넘나들며 무관학교 설립, 군정부 수립, 애국계몽운동, 무장투쟁운동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임시정부의 탄생을 주도했다.
이후로도 선생은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았다. 이승만 탄핵 사태,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임시정부가 분열할 때마다, 공석이 된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를 대리하면서 혼란을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국무총리, 내무총장, 군무총장, 법무총장, 국무령 등 웬만한 정부 직위는 다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