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화랑의 정신과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수련활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주 화랑마을. 석장사지 주변에 위치해 있다.
한정환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운 임금으로 진흥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흥왕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화랑도 창설이다.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은 민가의 낭자 중에서 효도와 우애 그리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슬기롭고 의로운 인재를 뽑아, 이들을 육성하기 위해 원화(原花) 제도를 만들었다.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들로 구성된 단체를 먼저 만든 것이다.
젊은 여성들을 뽑아 무리를 지어 놀게 하면서 그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발탁해 쓰기로 했다. 그래서 인재들 중 남모낭(南毛娘)과 교정낭(峧貞娘)이라는 두 여성을 선발하여 무리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우두머리를 원화라고 부르며 그들을 중심으로 무리와 어울리게 하였다.
두 원화는 300~400여 명이 넘는 무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였으나, 서로 자신의 우월성과 아름다움을 뽐내며 시기하고 질투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모를 자기 집으로 꾀어 술을 잔뜩 먹인 후 돌을 사용하여 죽인 후 북천에 빠뜨려 버렸다.
죽이는 모습을 누가 보았는지 '교정이 남모를 돌을 사용하여 죽인 후 북천에 빠뜨렸다'는 노래가 어린아이들 사이에 널리 불리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성 안의 젊은이들이 사실 확인을 위해 북천을 뒤져 남모의 시신을 찾아내자마자 분노하여 곧 교정을 죽인다. 이를 전해들은 진흥왕이 크게 노하여 명을 내리고 원화 제도를 폐지시켰다.
진흥왕은 비록 원화 제도는 실패하였지만, 나라를 융성하게 하기 위해 외모가 뛰어나고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양갓집 곱상한 남자들을 뽑아 '화랑'이라 부르게 했다. 화랑들은 경치가 빼어난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단련하였다.
화랑들은 무엇보다 친구를 중요시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는 의리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이것이 화랑 국선의 시초이다.
교우이신의 표본, 임신서기석을 발견하다
1934년 경주 송화산 기슭 석장사지에서 작은 비석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게 바로 임신서기석이다. 임신서기석은 길이가 약 30cm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로 아주 작으며, 한 면에 5줄 74글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신라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