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청일전자 미쓰리>에서 이선심 (이혜리 분)은 회사의 경리에서 대표이사가 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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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무살, 고등학교 졸업장 달랑 들고서 취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다. 연탄공장 총무부 사환 자리가 있었고, 의류공장 재봉틀 시다 자리가 있었고, 설계사무소 경리 자리, 그리고 스포츠용품점 판매원 자리가 있었다.
대학 진학을 한 친구들보다 4년 먼저 일을 시작하였으니, '4년 후 나는 당연히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득 안고 어디든 골라잡아 직장인이 되고자 했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부양가족이 단출했다. 엄마 한 분만 책임지면 됐다.
엄마는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어디든 취직만 되면 그날로 계를 부어 목돈을 만들어 전세방으로 이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오래 전부터 세워두신 분이다. 그래서 스무살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단 하루라도 허투루 허비하면 안 되었다. 어디든 취직을 해두고 일요일 집안일 모두 다 끝내두고 놀아야, 엄마 손바닥이 나의 등짝을 후려치는 아픔을 겪지 않을 수가 있었다.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나를 스무살로 키운 엄마의 척박한 삶에, 나의 월급들이 촉촉한 단비가 되어 갈라진 틈틈을 메워드려야 했다.
연탄공장 총무부 사환 자리나, 설계사무소 경리 자리나, 스무살짜리 여직원이 하는 일은 매우 비슷했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사무실 청소를 하고, 커피잔을 씻고, 금전출납장 장부정리를 하고, 커피를 타고 담배 심부름을 하고, 불리는 호칭도 회사마다 똑같았다. "김양아, 커피 한 잔" "김양, 담배 사왔어?" "김양아 내 구두는?"
아직은, 82년생 김지영들이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 한창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묵묵히 상급자들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고, 월급을 받았고 엄마의 곗돈을 부었다.
4년 먼저 시작했다고 해서, 4년 후 내가 친구들보다 월등한 가진 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은 일찌감치 깨달았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성실하게 커피만 타서는 월급봉투의 두께는 결코 두툼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만의 특화된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새 깨달았다. 이래서 공부를 더 해야 했다는 것도.
출퇴근 시각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중심 잡으려 이리저리 쏠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광고판 하나, '법무사 독학으로 취득 가능' 가방끈은 짧고 부양가족은 있고 언제까지 공장장님 구두 수발을 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뭔가 획기적인 돌파구는 있어야 하는데, 광고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정말 책만으로 법무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고민만 계속하다 결국 몇십 만 원짜리 책을 사지는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아직은 스무살이니까... 싶었던 모양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스무살은 적당히 게을렀고, 다소 태평스러웠던 듯하다.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월급쟁이 노릇만 하면 엄마가 밥은 먹여주고 잠은 재워주었으니, 입으로는 부양가족이 있고 나는 가장이라 떠들고 다녔지만 뼛속 깊이까지 절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들도 아주 많을 줄 알았던듯 하다.
정말 스무살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