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석장동엔 화랑마을이 조성돼 있다. 그곳에서 화랑의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을 만났다.
경북매일 자료사진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에 기대 설명하자면 이것은 '토대'인가 '상부구조'인가? 아니, 시간을 되돌려 150여 년 전 독일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의 수많은 역사학자와 사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혹자는 "충효와 유희가 결합된 한국 정신의 뿌리"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한국 종교사상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최근 아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을 휩쓰는 한류(韓流)의 출발점"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전 세대에선 화랑도(花郞徒)와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바로 '풍류도(風流道)'를 놓고 오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사전적으론 풍류도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원불교 대사전>의 경우는 "풍류를 닦던 신라의 청소년 심신수련 조직. 화랑도(花郞徒), 낭가(郎家), 국선도(國仙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신라 진흥왕대에 왕과 귀족의 자제로 조직된 이후 국가의 문무(文武) 인재를 이에서 취했다. 그 기원은 민족 고유사상으로 불교·유교·도교 등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유습은 고려 이후에도 이어져 문화·예술 및 풍속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이다.
반면 또 다른 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풍류란 속되지 않고 멋스러우며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풍류도라 함은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여 멋스럽게 노는 것을 말한다. 즉 노는 것을 '도(道)'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해가 어렵진 않지만,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풍류도를 둘러싼 갑론을박(甲論乙駁)과 설왕설래(說往說來)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왔고, '역사 관련 논쟁'이라는 특성상 어떤 학자도 선뜻 어느 한쪽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 고백을 덧붙이자면 '풍류도'에 관해 쓴 몇 권의 책과 10편이 넘는 학자들의 논문을 꼼꼼히 읽고 검토했음에도 그 맥락과 핵심을 짚어내기가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나의 한계 탓이다.
하지만 이 난감함은 풍류도에 관해선 현재까지도 원체 다양한 이론과 견해가 충돌하고 있고, 아직까지 누구나 고개 끄덕일 '100%의 수긍'을 이끌어낸 학설이 없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사학자 최광식 "풍류도는 화랑도의 지도이념"
이처럼 복잡다단한 학계 풍경에서 구구한 부연 없이 '풍류도'에 관해 비교적 심플하게 정의하고 있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이 고려대학교 최광식 명예교수다. 그는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라는 논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짤막한 문장을 통해 최광식은 풍류도가 토대가 아닌 '상부구조'였다고 설파한다.
학자에 따라 토착신앙, 불교, 유교, 도교가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각각의 견해가 분분한 가운데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즉 풍류도는 "그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라 멸망 이후에도 풍류도와 화랑도는 명칭과 사회적 기능 변화의 과정을 거쳐 고려로 계승됐다는 것이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생각.
이런 발전적 계승은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논거(論據)처럼 풍류도가 토착적 고유 신앙을 기반으로 해 외래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에도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임으로써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