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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출판
내가 <벤야민 번역하기>에서 가장 감탄했던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indignation)에 나오는 주인공 마커스는 학구적이며 모범적인 학생이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오하이오 주의 작은 학교에 편입을 한다. 그 학교에서도 이런 저런 갈등을 겪은 그는 한국전쟁에 징집되어서 1952년 어느 날 20살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전사한다.
신을 믿을 수도 찬송가를 들을 수도 없었던 마커스는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채플을 등한시 한 그에게 학장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채플에 참석해야 퇴학을 시키지 않겠다고 엄명했다. 마커스는 순종 대신에 학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욕설('X까 씨X')을 내뱉었다. 마커스의 학창시절과 꿈과 희망은 욕설로 종지부를 찍었고 오하이오보다 훨씬 더 먼 한국에서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죽었다. 학사 학위도, 미래도, 생명도 그렇게 함께 사라졌다.
평범한 독자는 이 대목에서 대체 원문의 어떤 말을 'X까 씨X'로 번역했는지 궁금해 한다. 1950년대 미국 대학생이 그런 욕을 한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느낀다. 원문은 'F*** you'다. 번역가는 아무래도 이 욕설만으로는 주인공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비범한 저자 김재준 선생은 번역의 문제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 마커스가 혹시 실존 인물이 아닌지에 관한 호기심을 가졌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모든 미군의 명단과 통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기게 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책과 자료를 모으는 것이 인문학의 출발 지점이라는 것을 이 사례로도 증명이 된다.
한국 전쟁 미군 전사자 중에서 마커스의 고향 출신이 16명, 그 중에 19살은 3명, 그 중 1952년에 전사한 미군은 단 한명 그의 이름은 Russell John Graf 1933년생. 원산에서 전사했고 뉴저지에 안장됨.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indignation)은 실존 인물 러셀(Russell John Graf)
를 모델로 삼았다.
번역, 통계, 전쟁사, 문학이 어우러진 이 에피소드는 <벤야민 번역하기>를 대표한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 그렇다. 책은 원래 독자에 따라서 다르게 읽히는 것이 정상이다. <벤야민 번역하기>를 읽고 나니 오히려 <그림과 그림 값>이 낯설다.
<벤야민 번역하기>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것들로 오해받는 것들의 진가를 다른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다른 책들이 밋밋하고 심심해서 못 읽겠다. 한동안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는 난독증으로 고생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후 오랜만에 겪는 일이다.
벤야민 번역하기
김재준 (지은이),
소명출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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