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동아일보> 1928년 2월 11일자에 실린 오동진 선생의 부인 회견기. 선생의 부인 "이양숙(李陽淑) 여사는 지금까지 자기 남편이 남의 손에 잡힌 줄도 모르고 있던 중, 최근에 신문지상으로 그 소식을 듣고 (중략) 신의주로 와서 철창에 있는 오동진과 눈물겨운 면회를 하였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자유신문> 1945년 12월 4일자에 실린 ]'불굴의 투사' 오동진 선생 추모회 기사.
국사편찬위원회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은 김동삼, 김좌진, 오동진 장군이다. 그러나 김좌진, 김동삼과 달리 오동진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 김좌진 장군과 똑같이 1962년 독립유공자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음에도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
길을 가는 식자층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김좌진은 알아도 오동진은 모른다. 코뮤니스트가 아님에도 연구의 불모지이자 대중들에겐 무척 낯선 인물임에 틀림없다. 1927년 12월 16일 장춘(長春)시에서 악질 친일경찰 김덕기(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형사)를 비롯 신의주 형사대에 피검되기 직전까지 오동진 장군의 활약상은 눈부시기 그지없다.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가 창립된 1922년부터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체포된 1927년까지 연인원 1만4149명의 독립군을 지휘했다. 그 결과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살상 149명, 밀정과 친일파 처단 765명은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가 밝힌 통계 수치로서 오동진 장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투쟁 경력이다.
그만큼 오동진 장군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 인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실제로 일제 식민당국은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현상금 10만 원을 내걸 정도였다. 당시 10만 원이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13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현상금인 셈이다.
일찍이 오동진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靑水洞) 659번지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생모 한씨(韓氏)와 사별했다. 오동진은 12살 때부터 계모 밑에서 성장한 후,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단기 사범과를 2년 만에 졸업했다. 민족학교인 대성학교 재학 당시 오동진은 항일민족의식과 함께 기독교를 접했다.
졸업 후 고향 의주에서 1910년 민족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세워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평양 숭실중학교 출신 장인환이 설립한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항일계몽운동을 펼쳤다. 특히 오동진은 기독교 집사로서 그리고 교육구국운동 차원에서 기독교와 근대 교육을 열성적으로 전파했다. 그 결과 오동진이 살고 있던 마을 전체를 기독교 신앙으로 전도해 마을 사람들 모두 크리스천이 될 정도였다.
일신학교 교사 생활은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통해 일신학교를 강제 폐간시키면서 교사로서 생활을 접었다. 이후 오동진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당시 상업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편이자 민족 운동가들의 연락거점으로 활용되었다. 1919년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자금을 출연하여 평안북도 삭주군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리고 몸소 교사가 되어 '배달의숙'에서 계연수, 최시흥과 함께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조선 민중은 불같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려
그러던 중 오동진이 30세 되던 해 3・1만세 시위가 전국적으로 활활 타올랐다. 오동진의 고향인 평안북도 의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동진은 3・1만세 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3・1만세 운동을 촉발시킨 고종 독살설은 송암 오동진 선생으로 하여금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위 참가 사실이 일제에 적발돼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寬甸縣) 망명 이후, 오동진은 1919년 4월 윤하진, 장덕진, 박태열과 함께 '광제청년단'을 조직해 항일민족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1919년 11월 안병찬과 함께 안동(중국 단둥시)에서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오동진은 '대한청년단연합회' 교육부원으로서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강연회를 주도했다.
오동진은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비롯해 남만주 항일단체를 통합한 '대한광복군 총영'을 1920년 9월 조직했다. 오동진은 31살에 대한광복군 총영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한 해 동안 국내로 진격해 일제 군경과 교전한 기록이 78회에 이르고 경찰관 주재소 56개소를 습격했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의 최전선인 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를 비롯해 행정기관 20개소를 파괴했고 일제 군경 95명을 사살했다.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에 대한 습격은 국경지방 일대, 일제의 식민통치 기능을 거의 마비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무엇보다 오동진 장군의 '대한광복군 총영'의 특기할 만한 사건은 3・1 혁명 100주년을 맞아 지난 해 여성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여장부 안경신 의사의 평안남도 도청 폭파 사건이다. 오동진 장군은 미국 상하 의원단 일행이 동양을 시찰하면서 조선에 들른다는 중요한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하여 7월 '대한광복군 총영' 결성 직후, 소속 대원들을 신의주, 평양, 서울 등 3개 지역으로 결사대를 편성해 조선에 침투시켰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는 처음 권총과 전단지 4만 장, 그리고 폭탄을 휴대하고 7월 15일 광복군 총영을 출발했다. 임신한 상태로 압록강을 무사히 건넌 여장부 안경신 의사는 평안북도를 지나 청천강을 건넜다. 그러나 평양으로 가는 길목인 평안남도 안주에서 일제 경찰의 검문을 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안경신 의사 일행은 검문하던 일경을 사살하고 8월 1일 목적지 평양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8월 3일 밤 안경신 의사는 치마에 숨겨 놓은 폭탄을 꺼내 평안남도 도청을 향해 힘껏 던졌다. 순식간에 굉음과 함께 평남 도청 건물 일부와 도청 옆 건물인 평양경찰서 건물 벽을 박살내버렸다. 평양경찰서 벽이 박살나면서 일본인 경찰 두 명이 파편에 맞아 즉사했다. 안경신 의사의 투탄에 이어 결사대원들은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을 폭파했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원들의 투탄 사건은 3·1 만세 시위의 패배를 딛고 일으킨 통쾌한 거사였다. 3·1혁명이 잔혹하고 처참하게 진압되었음에도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조선 민중은 야만적인 식민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여전히 불같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남과 북에서 모두 인정받는 항일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