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룡산성 성벽이곳이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음을 알리는 팻말을 누군가 세워두었습니다.
서부원
남원대회 후 김개남은 남원의 동학농민군을 각 군ㆍ현으로 배치하고 정예 100명과 함께 임실의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농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관과의 약속을 지키며 농번기가 끝나는 9월 이후를 기다리면서 정세를 관망하기 위해서였다.
김개남이 남원을 떠난 후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안의사건(安義事件)으로 "안의사건이라는 것은 남원의 동학군이 운봉을 거쳐 함양군 지곡면의 부자 정씨로부터 많은 식량을 얻어내고 7월 10일 안의현까지 가서 현감 조원식에게 군량미 지원을 요구한다. 조원식 현감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많은 술과 음식으로 농민군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날이 저물자 숨겨두었던 장정들이 불시에 습격하여 농민군은 대척해 보지도 못한 채 수십 명(혹은 300여 명)이 죽고 몇 십 명(혹은 10여 명)만 살아 돌아오게 되는 사건이다." (주석 11)
다른 하나는 운봉 출신 박봉양의 배신이다. 박봉양은 장수의 황내문 접주를 통해 동학에 입도하고도 작당하여 반기를 들었다. 안의사건으로 영남지방에 집강소 설치 등이 좌절되면서 동학농민군 조직이 확대되지 못하고, 박봉양의 배신으로 동학조직에 균열이 생겼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김개남은 8월 25일 서둘러 남원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데 7만 여 명의 대부대였다고 한다.
주석
9> 김은정 외, 『동학농민혁명 100년』, 290쪽, 재인용.
10> 우윤, 앞의 책, 232쪽.
11> 『남원의 동학 운동과 동학농민혁명』, 41~42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