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가족 생계 책임지는 소년 가장에서 실업가로
김우중은 해방 9년 전인 1936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어머니 전인항과 아버지 김용하 사이에서 출생했다. 1987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인 '경향신문 판매 소년 시절이 그립다'에도 소개된 것처럼, 아버지 김용하는 대구사범학교 학장을 지낸 교육자였다. 박정희가 다닌 그 대구사범에 김우중의 아버지가 재직했던 것이다.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일반적인 경우라면 부모 지원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우중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아버지가 납북된 후로 그는 고학생으로 살아야 했을 뿐 아니라 소년 가장으로서 가족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위로 형들이 있었지만, 군에 가고 없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와 형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위 <경향신문> 기사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속칭 '신문팔이'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989년에 펴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그는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며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열네 살짜리 사내애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고 회고한다.
그는 대단한 소년이었다. 신문 판매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학업의 길에서도 성과를 축적해 나갔다. 서울수송초등학교·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에 이어 연세대학교 경제학과까지 졸업했다. 이때가 4·19 혁명이 발발한 1960년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24세 때 대학 졸업을 마쳤으니, 그의 의지와 능력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인간적인 면만 놓고 보면, 그는 나무랄 데 없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가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그런 도움도 제공됐을 것이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초년생으로 일한 시기는 4·19 혁명이 5·16 쿠데타에 의해 뒤집히던 때였다. 이 시기에 한성실업에서 회사원으로 근무한 그는 31세 때인 1967년 3월, 대도섬유 도재환 사장과의 5:5 공동출자로 역사적인 기업인 '대우실업'(자본금 500만원)을 설립했다. 대우라는 명칭은 대도의 '대'와 우중의 '우'에서 딴 것이다. '우대'가 되지 않고 '대우'가 된 것은 어감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돈을 댄 쪽이 대도섬유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4월 7일자 <매일경제> 기사 '신세대 경영인맥 (3)신(新)창업세대'에 따르면, 말이 5:5 출자였지 자본금만 놓고 보면 10:0이었다. "김 회장은 출자 지분 없이 판매 책임자로 지분 50%를 가졌을 뿐"이었다. 대우실업 설립 당시에도 김우중한테는 사업자금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출발한 대우실업은 훗날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의 눈부신 성장을 단기간에 이룩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구약성경 <욥기> 8장 7절을 떠올리게 할 만했다.
첫 해에 58만 달러어치를 싱가포르에 수출하고 인도네시아·미국 등지로 판로를 넓힌 김우중은 1970년대 초반에는 업종을 넓혀 대우건설·대우증권·대우전자·대우조선 등을 보유하게 됐다. 그는 창업 7년 만인 1974년에는 '1억불 수출'로 신흥 재벌 반열에 올라섰다. 1979년에는 새한자동차 회장이 되어 자동차산업에도 뛰어들었다. 그의 재계 순위는 1980년대에는 4위, 1990년대에는 2위까지 올라갔다.
1967년에 김우중에게 사업자금을 대준 도재환 사장은 어떻게 됐을까? 도재환의 그 뒤 상황을 인상적으로 보여줄 만한 두 건의 일화가 있다.
1977년 6월 10일 김우중은 대우를 대표해 원호성금 2억원을 <동아일보>에 기탁했다. 그는 이듬해에는 '대우그룹 김우중' 명의로 2억 5천 만원을 기탁했다. 반면, 도재환은 1977년 11월 25일 <경향신문>에 불우이웃돕기 성금 20만원을 기탁했다. 1977년에 김우중이 기탁한 금액의 1000분의 1을 냈던 것이다.
1977년 당시 도재환의 직책은 대도화섬 사장이었다. 김우중의 급성장과 관계없이 여전히 대도화섬 사장이었던 것이다. 위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도재환은 창업 3년 뒤인 1970년에 투자금을 회수해 갔다. 이로써 대우는 김우중의 것이 됐다. 투자금을 회수한 도재환은 김우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평범한 기업인으로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