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고통>
동녘
<보이지 않는 고통>은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과학자의 분투기다. 캐런 메싱은 원래 유전자를 연구하는 생물학 교수였지만, 노동 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역학관계를 밝히기 위해 인간 공학으로 전공을 바꾼다. 캐나다의 많은 노동현장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노동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퀘벡 병원의 청소노동자, 주유소 체인점의 노동자, 음식점 종업원, 호텔노동자, 은행노동자, 콜센터 직원의 현장을 수십년간 관찰하고 인터뷰한 기록이다.
청소노동자들의 고된 업무나 비효율적인 동선과 같은 물리적인 부분부터, 팁을 받는 여성 노동자에게 가해지는 심리적 착취, 자신의 본업이 아닌 상품을 판매해야되는 '행상'으로 전락해버린 은행원, 불규칙적인 근무시간 때문에 육아를 제대로 할 수 없어 가정 파괴 직전에 이르는 콜센터 직원의 고통과 스트레스 등 사회적인 구조 문제까지 다룬다. 결국 한 사람의 노동은 그 개인의 문제뿐 아니라 가족과 사회, 나아가서는 한 나라의 운명과도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감 격차'를 아시나요
서비스업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불평등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계산원이나 접수원, 주유소 직원 등이 의자에 앉지 못하는 것은 사업주가 '고객을 상대할 때 (종업원이) 서 있어야만 하며, 앉아있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통해, 불합리한 노동환경은 사회적인 구조와 불평등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환자를 맞이할 때 일어서서 맞이하는 의사는 없기 때문이다.
용감하게도(?) 과학자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한 부분도 있다. 저자는 보고서에 제출하기 위해 여성노동자의 청소 촬영 여부를 물어보는데 '당신(저자)의 실크블라우스를 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는 여성 노동자의 말을 듣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허름한 옷을 입은 여성노동자를 촬영하려 간 자리에 화려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다. 자신조차 기본적인 감수성이 없었음을 깨닫는데, 그 깨달음의 시작이 '공감 격차'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는 이제야 산업재해나 근무환경, 직업보건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추세지만, 캐런 미싱이 인간공학 연구를 한 시점은 1980년대다. 우리 사회보다 캐나다, 유럽은 노동환경이 많이 나은 편인데도, 캐런 메싱은 자신이 했던 연구, 기록 등이 노동 환경을 개선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이 있겠지만, 캐런 메싱은 기업과 손을 잡고 유착관계에 있는 양심없는 일부 과학자와,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할 노동조합들과 관계자들이 수시로 교체되어서 더 이상 바뀌지 않는 현실을 꼽았다.
저자는 아마도 시시포스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연구와 관찰, 기록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노동자들, 마치 이단아 취급을 하며 왕따시키는 과학계와 기업들, 기껏 바꾸어놓았는가 싶으면 몇 년 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버리는 노동 환경.
죽을 힘을 다해 정상까지 끌어올렸던 바위가 다시 떨어지고, 그걸 다시 힘겹게 끌어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기력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캐런 메싱은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동 환경을 바꾸지 못했다고 고백하지만, 과연 그럴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분명 변화는 일어났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