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들은 어째서 열거만 해도 시가 될까? 마치 꽃 이름을 하나하나 적는 것 같다. 꽃의 이름도 적기만 해도 시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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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먹고, 소박하게 살면 그리 큰돈을 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므로, 자본의 노예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연금이 고갈되지만 않는다면, 노부부가 둘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품위유지비로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 식탁에 올릴 것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하고, 밭에서 나는 것은 이웃들과 나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가능하려면 시골이어야 하고, 시골에는 내가 밭에서 키우는 것들은 지천일 수도 있으니, 사랑하는 아이들과 도시에 사는 친구들과 나눠야할 것이다. 내가 먹고 사랑하는 이들이 먹을 것이니, 당연히 화학비료나 농약을 사용하면 안 될 터다. 유기농 농사를 지으려면, 퇴비를 만들어야 할 것이고, 퇴비를 만들려면 남은 음식물이 좋은 재료가 될 터이니 우리 집에는 '음식물쓰레기'라는 단어가 없을 것이다.
몇 가지 빠진 것들이 있지만 다시 한 번 써본다.
무, 상추, 근대, 쑥갓, 겨자, 시금치, 열무, 양배추, 케일, 당근, 배추, 실파, 대파, 부추, 마늘, 양파, 땅콩, 토마토, 작두콩, 완두콩, 오이, 호박, 파슬리, 브로콜리, 오이, 호박, 들깨, 감자, 당근...
이것들은 어째서 열거만 해도 시가 될까? 마치 꽃 이름을 하나하나 적는 것 같다. 꽃의 이름도 적기만 해도 시가 되니까.
노부부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일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떤 날은 종일 일을 해야 할 날도 있겠지만, 그런 날은 집에 돌아와 씻고 누우면 단잠을 이룰 터이니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리고 농사일이라는 것이 매일매일 바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채소들이 자라 식탁에 올리기 시작하면 꽤 많은 시간이 남을 것이다.
그 시간엔 아내와 두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자연의 소리도 듣고, 감동을 주는 것들을 사진에 담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독서도 하고, 그 나이에서만 느끼고 알 수 있는 것들을 글로 남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도시에서 퇴물 취급당하지 않고도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틈나는 대로 하는 밭일은 온몸을 움직이는 운동이 될 것이니 별도로 '운동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휴가철이 되면, 아이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작은 연주회를 열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지금도 우리 가족이 모여서 다룰 수 있는 악기들이 제법 된다. 피아노, 기타, 베이스기타, 드럼, 팬 플루트, 첼로, 하모니카 연주가 가능하니 손주들도 두어 가지 악기를 가르치면 훌륭한 연주회를 열 수 있겠다. 이 날은 이웃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여야지.
그리고 은퇴 후, 노년의 삶을 살아가기 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겠다. 죽음이란,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는 것뿐이니 뭐가 그리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우연히 발견한 어머니의 유품을 보면서 나도 그렇게 어머니의 나이가 될 것이고, 어머니가 가신 곳을 향해서 갈 것을 생각하게 됐다. 꿈은 꾸지만,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소박한 삶을 빙자한 온갖 풍요를 누리는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꿈은 꾸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스무 살 꿈은 터무니없이 크고 막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