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5일 대통합민주신당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중앙당 창당대회를 갖고 `새정치의 지평을 열어갈 정당`의 출범을 선언했다.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창당대회장에서 손학규 전지사가 연설하고 있는 모습.
오마이뉴스 이종호
손학규는 오랜 정치 경력과 지도자 경험에 비해 조직력이나 자금력이 크게 떨어지진다. 하지만 두고두고 자부할 만한 성과물들이 있다.
경기도지사 시절에는 대규모 외자 유치 및 일자리 창출로 유능한 행정가의 면모를 남겼다. 정치통합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대통합민주신당 창당 과정과 통합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여러 세력을 묶어내는 능력을 보여줬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노동당과의 연대도 이뤄냈다.
때때로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대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무대를 잠시 떠나는 식으로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하나의 조직을 오랫동안 이끄는 데 필요한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한 그로서는 이 방식이 에너지를 보존하는 지혜로운 대처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같은 특장점들이 있는 반면, 신뢰를 떨어트리는 행적도 있었다. 당내 경선에 불복해 당적을 옮긴 행적, 그것도 민주 진영과 보수 진영을 두 번(1993년·2007년)이나 넘나든 행적은 신뢰도를 낮추는 요인이 됐다. 그의 이런 문제점을 누구보다 강렬히 비판한 이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와의 대담록인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 따르면, 노무현은 손학규를 기회주의적 정치인으로 인식했다. 이 책에 따르면, 노무현은 2007년에 손학규와 함께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든 정치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옛날에 YS의 3당 합당을 그렇게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하던 사람들이 지금 손학규 뒤에 가 줄 서 있는 거 보면, 그거하고 이거하고 뭐가 다릅니까? 나는 그런 것을 쳐다보고 이제 속이 타는 거지요."
손학규에 대한 노무현의 부정적 시선은 유시민이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에도 나타난다. 노무현은 손학규의 개인적 역량만큼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리더십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을 드러냈다.
손학규와 더불어 고건·정운찬·문국현을 함께 묶어 비판하는 대목에서 노무현은 "권력투쟁의 현실에 과감하게 뛰어들어 비전으로 타인을 설득하고 국민을 감동시키는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비로소 국민이 그 사람을 지도자로 신뢰하고 정치인들이 따르게 된다"면서 "높은 대중 인지도나 호감도만 믿고 밥상이 다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로는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밥상이 다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자세'라는 표현에서 손학규에 대한 노무현의 인식이 묻어난다. 새로운보수당과 안철수계 내에도 이런 시각으로 손학규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손학규의 좌우명
손학규의 젊은 시절을 만화로 정리한 책이 있다. 김인수가 쓰고 김성주가 그린 <젊은 날, 거기 분노가 있었다>란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1969년 군에 입대한 손학규는 보직이 행정병이고 중대장의 배려가 있는데도 사격훈련에 빠지지 않았다.
만화 속 대사에 따르면, 상관은 "임마, 그래도 중대장님한테 말만 잘하면 훈련 제끼기 쉽잖아"라며 손학규를 애정 어린 태도로 나무랐다. 그러자 "전 싫습니다, 훈련은 훈련답게 받고 싶지 말입니다"라고 만화 속의 손학규는 답했다. 만화는 손학규의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 손학규의 좌우명을 배경 설명으로 소개한다.
"손학규의 좌우명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에 있든 주인공이 되라는 말이었다."
작(作)은 '만들다'뿐 아니라 '~이 되다(become)'나 '~이다(is, are)'의 의미도 있다. 어느 곳에 가든 주인이 된다는 수처작주 정신이 예전부터 그의 좌우명이었다. 노무현의 눈에는 손학규가 '남의 밥상'에 관심을 갖는 정치인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손학규 자신한테는 '내 밥상'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27일 안철수한테서 퇴진 요구를 받은 손학규는 28일 기자회견에서 "개인 회사의 오너가 CEO를 해고 통보하는 듯" 했다며 불쾌감을 토로했다. 바른미래당에서도 수처작주를 실천해 왔을 손학규의 입장에서는, 오너처럼 비쳐지는 안철수의 모습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뛰어난 역량과 오랜 경험에다가 행정과 정치통합의 성과를 기반으로 바른미래당 안에서 수처작주를 실천해 왔을 손학규에게, 안철수계와 유승민계는 당내 기반과 수적 우세를 무기로 퇴진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손학규는 '오너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을 수없이 다졌을지도 모른다.
손학규, 이민우의 벽 넘으려면...
지금의 손학규와 유사한 처지를 경험한 정치인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민우(1915~2004) 전 신한민주당(신민당) 총재다. 손학규만큼의 역량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이민우 역시 1958년 이래로 5선 의원의 경력을 쌓으며 정치활동과 민주화 투쟁에서 성과를 축적했다.
전두환 정권의 야당 탄압이 극심하던 1985년 1월 18일, 이민우는 동교동계 및 상도동계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 총재가 됐다. 자기 기반이 아닌 김대중·김영삼의 기반으로 총재가 된 것이다.
지금의 손학규처럼 이민우도 김대중·김영삼과 갈등을 일으켰다. 관리자형 총재로 만족할 수 없었다. 이민우 역시 수처작주의 정신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대중·김영삼의 의견을 무시하고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 개헌 움직임에 동조하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임의로 발표해버린 일이다.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원하는 상황에서, 당원들은 물론이고 당의 실질적 리더인 '양김'까지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신한민주당이 혼란에 빠졌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당을 나간 것은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였다. 이 상황을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이민우 총재의 타협적인 노선에 위기감을 느낀 양김 세력이 집단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는 말로 설명한다. 지금의 손학규처럼 이민우도 홀로 당을 지키게 됐다.
이민우가 아니라 김대중·김영삼이 당을 나갔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민우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하지만 오래갈 수 없는 승리였다. 자기 기반이 없는 이민우가 독자적으로 당을 끌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11월 6일, 이민우는 정계은퇴 선언을 했다.
손학규와 이민우의 처지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이민우가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시대 흐름을 읽고 기민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손학규는 많이 보여줬다. 그렇기 때문에 손학규가 이민우와 다른 결과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첩첩산중이다. 유승민·안철수와 헤어지고 홀로 된 손학규가 이민우의 벽을 넘으려면, 오는 4월 21대 총선에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을 통해 자기 기반을 어느 정도라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로운 공직선거법 하에서 소수의 의석이라도 확보하면 차기 국회 하에서도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그렇지만, 단독으로 그런 성과를 얻어내기는 쉽지 않다. 유승민계에 이어 안철수계까지 떠난 상황에서, '손학규의 당'은 대중의 관심에서 자칫 완전히 멀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1987년 이민우의 전철을 그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손학규 입장에서는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는 이 상황,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가 묘수를 찾아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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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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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본 손학규, 비판 뛰어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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