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박정희 한미정상회담 장면(1961. 11. 14.).
국가기록원
윤보선의 사임, 만장일치로 의결하다
1961년 11월, 육군대장 계급장을 달고 미국에 간 박정희는 11월 14일 케네디와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미국이 박정희 군사정권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한미정상회담이었다. 윤보선은 그제나 이제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정권을 물려줄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믿었던 박정희에게 속아 계속 얼굴 마담 역이나 들러리 역할을 한 걸 그때서야 알아챘다.
그는 박정희가 '목숨을 걸고 혁명했다'는 말의 진의를 그때까지 미처 파악치 못했다.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비주류 육군 소장이 '목숨 걸고' 쿠데타를 한 뒤 만석꾼 아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이양할 수 있을까. 윤보선의 한심한, 대단한 착각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으로서 상황판단과 사리분별력이 부족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가장 중요한 헌정 수호 의지가 빈약한 함량미달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구시대 인물에 불과한 고집불통의 사람으로, 한 마디로 격동의 시대 대통령 감은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우리 현대사에 헌정 중단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우리는 어떤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재임기간 중 국리민복을 위해, 올바른 역사를 위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냉정히 비판해야 만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함량미달의 대통령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윤보선은 이런저런 배신감과 잔뜩 김칫국을 마셨던 데 대해 매우 분개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이승에서 끝내 화해치 못한 채 줄곧 앙숙관계가 된다.
박정희 역시 윤보선을 잘 이용했으면서도 구시대 인물이라고 헌 버선짝처럼 싫어했다. 박정희는 일찍이 고향집 이웃마을 만석꾼 아들 장택상도 몹시 싫어했다. 그들은 수많은 소작인의 피땀을 가로 채 호화유학한 이들로, 자기 같은 소작인 자식들은 상대도 않던 갑질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은 하야선언을 발표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박정희로부터, 그리고 링 밖에서 재미있게 관전하던 미국 측으로부터도 용도 폐기처분을 당한 걸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청와대를 떠나면서 그는 반드시 '권토중래'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지략이 부족했다.
다음은 1962년 3월 25일 자 동아일보 1면 보도이다.
"윤대 통령 사임허가
본인의 사의존중. 박 의장, 윤 대통령 사표 수리에 담(談).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윤 대통령의 사임이 최고회의 본회의에 의하여 허가된 직후 담화를 발표하고 '최고회의에서는 진지한 토의를 거듭한 나머지 결국 대통령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사임하겠다는 것이므로 그 의사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사임허가를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고 말하였다.
윤보선은 대통령 사임조차도 박정희에게 허가받는 수모를 당했다. 그는 평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변방의 한 육군 소장에게 이용만 당한 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 윤보선은 마음 속으로 칼을 갈았으리라.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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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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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박정희 말을 쉽게 생각한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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