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대학 앞뜰. 김성숙과 두군혜는 이곳을 함께 산책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김경준
임시정부는 왜 광저우로 갔을까
신규식의 동교장 방문 17년 만에, 임시정부는 광저우와 다시 연을 맺게 된다. 피난길에 오른 임시정부가 1938년 7월 광저우에 잠시 머무르게 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 내에서는 베트남으로 망명하자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정정화는 베트남 망명에 대해 "소수의 주장이었고, 가당치 않은 착상이었다"라며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다. 반(反) 식민투쟁을 벌이는 임시정부가 식민지배 하에 있는 베트남으로 망명한다는 것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시정부는 왜 광저우로 갔을까?
근처의 홍콩과 윈난(운남·雲南) 등지에서 수시로 대외 정보를 취득하거나, 연락선을 확보하기 위해 유리한 지점인 광저우로 왔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김구 역시 홍콩으로 업무를 보러 떠나기도 했단다(박광일 저,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 참조).
그러나 처음부터 광저우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히 그렇게 가게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윈난성 쿤밍(곤명·昆明)으로 가려다 교통 편과 여비 문제로 부득이하게 광저우로 갔다는 것이다(<백범의 길> 서울대 국사학과 은정태 박사의 글 참조).
임시정부의 광저우행이 우연이었든 아니었든 임시정부는 어차피 광저우에 오래 머물 처지가 못 됐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위협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저우 '동산백원' 앞에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웠으면
2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임시정부가 광저우에 머무를 때 쓰던 청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동산백원(東山柏園)'이다. 그런데 이 건물이 발견된 게 불과 3년 전인 2017년의 일이라 한다.
지금은 중국 현지인들이 살고 있는 가정집으로 변한 동산백원은 생각보다 잘 보전된 상태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앉아서 담뱃대를 물고 있을 듯한 풍경이 그대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