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동 윤보선 사저 사랑채
자료사진
만석꾼의 아들
1961년 5.16쿠데타가 나던 그해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휴학을 했다. 생활고로 자살을 꾀하던 중 한 걸인을 만난 뒤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고 주머니 속 약을 탑골공원 화장실에 버린 뒤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때 나는 <경향신문>을 배달했는데 그 구역은 종로구 가회동과 삼청동, 화동 일부였다. 재동 입구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에서 배달을 시작해 북촌 가회동길을 따라 삼청공원 어귀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고개를 넘어 삼청동 윗동네에서 내려와 화동 경기고등학교(현 정독도서관) 앞에서 끝났다.
바로 그곳에 윤보선 대통령 자택이 있었다. 주소는 안국동 8번지로 무려 250간의 대저택이었다. 복학 뒤 고3때 전남 보성 양조장집 아들 염동연이란 친구가 내 짝이었는데, 그의 집이 안국동 윤보선 댁 옆에 있었다.
그 친구는 그때부터 영남 친구를 좋아한 듯, 수시로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가난한 친구의 굶주린 배를 채워줬다. 그의 너그러움과 인정이 후일 정치인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기도 한 듯하다(그는 훗날 노무현의 측근으로 평가받았다). 그 친구 집을 갈 때마다 윤보선 사저를 볼 수 있었다.
윤보선 집안은 대통령을 비롯해 집권당 대표, 서울대 총장, 대사, 장성, 장·차관 등 고위 고직자 등 13명을 배출했다. 의사만 60여 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가히 '세도가'라 할만 했다.
윤보선은 1897년 충남 아산군 음봉면 뒷내 마을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6년 신학문을 배우고자 상경해 교동소학교(현 교동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4년제를 수료한 뒤 히노데(日出)소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게이오(慶應)의숙 중등부에 입학, 2년 쯤 공부하다가 귀국했다.
다시 상하이로 건너간 뒤 임시정부 최연소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6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영국 에든버러대학교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당시 영국인 평균 임금이 7파운드이었는데, 그는 400파운드를 주고 이탈리아제 스포츠카를 구입해 타고 다녀 한국의 '프린스'로 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