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리 임페리알리 모습무솔리니가 건설한 '제국의 길'이 포로 로마노를 가르고 있다.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이마누엘레 2세 기념관과 콜로세오를 연결하는 도로로, 파시즘의 대표적인 잔재다.
서부원
웬만한 카메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의 콜로세오 곁이라 포로 로마노는 마치 건물의 부스러기마냥 초라하기만 하다. 포로 로마노의 전경을 어떻게 사진에 담든 배경처럼 뒤엔 콜로세오가 자리한다. 하지만 절반 가까이 부서진 콜로세오도 엄연히 포로 로마노의 일부다.
잔해일지언정 과거 화려했던 로마의 영광을 증명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기독교가 공인된 뒤 신전이 방치되고, 알프스 너머에서 고트족이 침입해 로마를 멸망시킨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 신전이 성당으로 고쳐 세워지는 모습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로마 공화정을 이끈 원로원 건물과 난세의 영웅 카이사르의 화장터가 있고, 그의 후계자로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자취도 오롯하다. 콜로세오를 건설한 황제 티투스와 지금의 중동 지방을 복속시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공을 기린 개선문은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다. 두 개선문은 지금 포로 로마노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섰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뒤 세운 개선문도 빼놓을 수 없다. 콜로세오 곁이어서 왜소해보일 뿐, 앞선 두 개선문을 합해놓은 규모다.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옮겨가려다 실패한 걸작으로, 이후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세운 개선문의 모델이 됐다.
콜로세오의 반대쪽 포로 로마노의 끝은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인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관이다. 그 옆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과 계단이 있어, 대개 사람들은 이곳에서 포로 로마노 관광을 갈무리한다. 주지하다시피,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화가다.
카이사르에서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폐허로 남은 포로 로마노는 최소 1500년이 넘는 로마의 역사를 일관된 스토리로 엮어낼 수 있는 곳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귀로 듣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훨씬 길다. 사실로서의 역사와 버무려진 이야기는 세월의 더께가 더해지면서 숙성되는 술처럼 재미와 의미를 더해가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잔해만 남은 포로 로마노는 자동차 도로에 의해 둘로 쪼개져 있다. 콜로세오와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잇는 500m 남짓의 로마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왕복 4차선의 대로다. 수많은 고대 로마의 유물이 도로 아래에 깔린 형국이다. 길 이름은 '포리 임페리알리', 우리말로 '제국의 길'쯤 되겠다.
로마의 황제들이 오갔던 길을 부르는 말이지만, 지금의 도로는 '로마 진군'으로 권력을 잡은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무솔리니가 건설한 것이다. 로마 시민들에게 군사 퍼레이드를 보여주기 위해 급조한 무대였던 셈이다. 그는 장갑차와 탱크 등을 앞세운 열병식을 통해 권력을 강화했고, 수천 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으로 귀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