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판테온의 돔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 외에도 여러 고대 로마의 무덤과 유적을 연구했다
박기철
그는 평가 위원회에 자신이 완벽한 돔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아이디어를 훔쳐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경쟁자들은 브루넬레스키가 허풍을 떠는 거라며 비난했다. 이에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돔 공사를 맡기자고 제안했다. 여러 명이 도전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의 끝을 깨서 세운다.
경쟁자들은 저런 방법이라면 자신들도 달걀을 세울 수 있다며 분노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바로 이것이 자신의 방법을 공개할 수 없는 이유라고 말했다. 방법을 공개하면 아이디어가 도용 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우여곡절 끝에 브루넬레스키가 돔 공사를 맡게 된다. 어쩌면 '콜럼버스의 달걀'보다 '브루넬레스키의 달걀'을 원조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돔 공사의 인부들
1420년 8월 7일 기공식이 열렸다. 공사에는 채석장 인부까지 포함하여 총 300여 명이 투입되었다. 이들의 근무환경은 매우 가혹했다.
작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해가 긴 여름에는 열네 시간 이상을 일했다. 120미터 높이에서 좁은 비계 사이를 오가는 것은 여러 사고를 불러왔다. 실제로 인부가 추락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축 위원회는 장례비만 지급했을 뿐, 유족에게는 한 푼의 위자료도 없었다.
위원회는 공사 인부들이 작업 시간 동안 땅으로 내려올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오르내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인부들은 하루 종일 그 높은 곳에서 거의 쉬는 시간 없이 작업했다. 뜨거운 여름 오후에 즐기는 시에스타(낮잠)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인부들이 들고 일어나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루넬레스키와 위원회는 이들을 모두 해고해 버린다. 하지만 인부들은 대부분 지독하게 가난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파업을 철회한다. 이때 위원회는 처음보다 더 낮은 임금을 강요했고 인부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동의한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 끝나지 않은 라이벌 관계
공사를 맡기긴 했지만 위원회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례당 청동문을 두고 경쟁했던 로렌초 기베르티를 공동 책임자로 임명한다. 성격이 불 같아 통제하기 어려운 브루넬레스키보다 유연하고 우호적인 기베르티가 함께 한다면 불안감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불안했는지 위원회는 공동 책임자를 7명까지 늘리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는 공동 책임자였지만 그 역할에서는 큰 차이가 났다.
임원들이 규정한 필리포의 임무는 '돔의 축조, 존속, 완성에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제공, 준비, 제작하거나, 이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반면 로렌초의 임무는 단순히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선에 머물러 있었다.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이희재 옮김, 세미콜론)
이렇게 곁가지 역할만을 하는 기베르티였지만 급여는 브루넬레스키와 같았다. 건축 관련 경험이 일천하고 공모전에도 참가하지 않은 기베르티가 공동 책임자로 임명된 것에 브루넬레스키는 분노했다. 거기에 급여까지 같은 데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베르티를 몰아낼 방법을 강구했다.
필리포는 돔을 완성하기 위해 나무 사슬을 이용한 공정을 구상했다. 나무 사슬 작업을 위한 밤나무가 도착했을 때 브루넬레스키는 옆구리에 통증을 호소하며 병상에 누워 버렸다. 혹자는 이를 꾀병이라며 힐난하기도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현장에 나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모든 작업은 기베르티가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가 나무 사슬 작업에 대해 기베르티에게 알려줬을 리가 없다. 게다가 기베르티는 청동문 제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현장은 멈췄고 조급해진 위원회는 브루넬레스키에게 제발 어서 현장으로 복귀해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위원회는 그의 연봉을 100플로린으로 거의 세 배나 높여 주었다. 반면에 기베르티의 연봉은 여전히 36플로린이었다. 자신의 중요성이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브루넬레스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현장으로 복귀한다. 나중에 기베르티는 두 번째 청동문(일명 '천국의 문') 제작을 맡으면서 서서히 돔 공사에서 멀어졌고 모든 것은 브루넬레스키가 장악하게 된다.
1436년 3월 26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대성당의 축성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8월 30일,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았다. 드디어 약 400만 장의 벽돌로 쌓은 지름 45미터의 돔이 16년 23일 만에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