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 첫 눈이 내리던 날
추미전
부산 사람들은 '첫눈'이라는 단어에 그닥 설레지 않는다. 부산에 살면 '첫눈'이라는 단어가 특별한 추억과 함께 기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첫눈'이고 마지막 눈이고 구분할 것도 없이 겨울이 다 갈 때까지 눈 한번 보기가 쉽지 않은, 그야말로 따뜻한 남쪽 도시인 까닭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간혹 밤새 내린 눈을 새벽녘에는 잠깐이나마 보는 행운을 간혹 누릴 수도 있었는데, 지구 온난화의 여파 탓에 최근에는 그마저도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때문에 부산 사람들이 기억하는 눈의 추억은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경험한 눈이다.
나도 몇 년 전 대관령 양떼 목장에서 폭설을 맞은 기억이 가장 강렬한 눈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눈을 보는 것도 하필 눈이 올 때 그 지역에 가 있어야 하니 그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첫눈'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올해는 반드시 한번은 어디선가 눈을 한번 봐야지' 하는 결심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런 결심을 했건만 아직 그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였다. 더구나 올해는 전국적으로 눈이 귀하다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어서 언제 그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미지수인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새벽(1월 18일), 휴대폰을 보니 날씨가 검색어 순위에 올라 있었다. 자세히 보니 김해, 경주 등지에 눈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경주면 부산에서 한 시간 거리, 이 참에 눈을 보러 갈까? 잠시 망설였다.
눈은 떴지만 아직 몸에 묻은 잠을 떨쳐내고, 새벽 거리로 나서는 게 귀찮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올해 눈을 보는 건 정말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과감히 몸을 일으켰다.
집을 나서자 아직 주변은 어두웠고 부산에는 제법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위쪽 지방으로 가면 눈이 되겠지' 기대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나 정작 부산을 벗어나자 비는 그쳤고 날씨는 흐렸지만 눈도 오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가는 내내, 운전대를 '김해로 바꿀까? 경주까지 가야하나?' 망설였다. '김해'는 더 가깝긴 했지만 이왕이면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눈을 보고 싶었다.
"그래, 결정했어. 불국사. 이왕이면 천년고찰에서 눈을 보자."
고속도로를 달렸다. 내내 눈이 보이지 않아 걱정을 했는데 경주 외동터널을 빠져나오자 주변 높은 산에 쌓인 눈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눈이 내리지는 않고 있었다. '아, 이왕이면 내리는 눈을 봐야 하는데...' 불국사 주차장에 도착한 것이 아침 8시,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내가 첫 방문객인 모양이었다.
주차를 하는데 유리창에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비일까? 눈일까?' 자세히 보니 금방 녹아버리긴 하지만 분명 눈발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차에서 내리니 제법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 싸락눈이어도 부산 사람들에게는 엄청 감동이다. '내리는 눈을 볼 수 있는 게 어디야!'
입장권을 끊고 불국사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 산사는 수묵화처럼 아름답고 고요했다. 공기도 마치 박하사탕을 입에 넣을 때처럼 상쾌하고 청량했다. 더구나 주변에 사람이라곤 없는 산사를 혼자 걸어 보는 것은 너무 신선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