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당에 걸려있는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 그의 글씨는 획이 기름지게 살쪄 두툼하고 묵직한 예서체로 원교의 글씨와는 상반되는 미감을 보인다.독특한 추사체의 매력에 잠시 빠져들었다. 주지스님의 요사채인 '일로향실(一爐香室) 현판도 추사의 글씨이다.
김숙귀
대웅보전 편액을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추사 나이 54세,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벗인 초의를 만난다. 이때 원교의 대웅보전(大雄寶殿 )글씨를 보고 초의선사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원교의 편액을 떼어내라며 야단을 쳤다. 추사의 극성에 못이긴 초의는 원교의 편액을 내리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
63세의 노령에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초의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고 자신이 쓴 대웅보전의 글씨를 올려다 보게 된다. 그리고 그 편액 속에 담긴 자신의 교만과 독선을 깨닫는다. 추사는 자신이 명필 이광사의 글씨를 못 알아보았으니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고 자신이 쓴 것은 내리라고 말한다. 추사는 8년여 간의 힘든 유배 기간 동안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지혜와 겸손함을 얻은 것이다.
표충사 입구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 있는 초의선사의 동상이 있다. 동상 앞에 서서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두 분의 아름다운 우정을 생각한다. 1786년생으로 동갑인 두분은 30세에 만나 평생 차와 마음을 나누었다. 제주도 유배 시절, 대흥사에 있는 벗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는 이야기가 추사의 편지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 표충사에 들어섰다. 표충사는 임금이 내린 사당의 이름으로 밀양에도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당 유정스님을 모시는 표충사가 있다. 표충사의 편액은 정조대왕이 친히 내린 어필(御筆)이다. 힘차고 장중한 필치가 대사의 충의를 기리는 듯하다. 서산대사의 영정 앞에 잠시 머무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