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눈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진수(뒷모습)
미디어눈
자유는 달콤했고 결과는 씁쓸했다
여느 때처럼 친구와 놀던 밤, 길가에 키가 꽂힌 오토바이가 있었다. 진수와 친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진수는 충동을 못 이기고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달린 지 얼마 못돼 주변에 있던 차를 들이받았고, 진수의 일탈은 CCTV에 고스란히 담겼고 경찰서에 가게 됐다. 죄목은 특수절도.
진수가 저지른 첫 번째 범죄다. 경찰은 초범이라는 이유로 진수를 훈방 조치했다. 훈방 조치를 받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진수에게 관심이 없었고 여전히 술만 마셨다. 진수는 또다시 집을 나갈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집에서 벗어난 자유의 맛은 달콤했지만, 당장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다시 가출한 진수를 맞아준 것은 이미 자퇴해서 무리를 이뤄 살아가는 친구들뿐이었다. 이들은 인형뽑기 기계를 털어 모은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두려움과 거부감이 들었지만, 친구 말처럼 집에 돌아가서 아빠한테 맞는 것보다 어쩌면 소년원에 가는 것이 좋을 것도 없지만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 대구, 대전 등 전국을 돌며 4개월 동안 인형뽑기 기계에서 돈을 훔쳤다. 30여 차례 범죄를 저지른 후에야 진수와 친구들은 경찰에게 꼬리를 잡혔고 범행은 끝났다.
결국 진수는 친구들과 재판을 받게 됐다. 법정에 서기 전까지는 친구들과 까짓것 뭐 대수인가 생각했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피해자들에게 물어줘야 할 돈이 5천만 원이 넘었다. 판사님에게 지금껏 저질렀던 죄목을 직접 들으니 자신이 범죄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됐다. 판사님 앞에서 할머니는 제발 한번만 봐달라고 빌었고, 진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제야 지난 일이 후회되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진수의 친구는 이미 이전에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던 터라, 더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재판 기간에도 범죄를 저지른 친구는 결국 소년원에 갔고, 진수는 소년원 송치 기준인 8호보다 낮은 6호 처분을 임시로 받아 보호시설에 들어갔다.
보호시설에서 5주 동안 진수는 자신의 잘못과 반성을 빼곡히 적었다. 최종 판결에서 판사는 진수가 다른 아이들처럼 토 달지 않고 반성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든다고 했다. 하지만 진수의 가정환경에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소년법 1호 처분을 내렸고, 진수는 "대안 가정"인 '청소년회복지원시설'(이하 쉼터)에서 6개월 동안 생활하게 되었다.
새롭게 박힌 '가족'이라는 말
'가족'이라는 단어는 진수에게 한 번도 안정감을 준 적이 없었다. 진수에게 '가족'은 술에 취한 아버지, 그리고 집을 나간 형의 모습뿐이었고, '집'은 항상 벗어나고 싶었던 공간이었다. 그래서 쉼터에 갈 때도 가족 공동체, 대안 가정이라는 말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법원 앞에서 센터장님과 처음 만나 쉼터에 왔을 땐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6개월 동안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나갈 수 없었다. 진수는 여전히 홀로 어딘가에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런 쉼터에서도 특별한 일이 있을 땐, 외박이 허락됐다. 떠나고 싶었던 집이었지만, 떨어져 살다 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진수에게 집은 여전히 발붙이기 힘든 곳이었다.
"짐승도 아니고, 하다 하다 가족한테도 그러나!"
쉼터에서 외박을 나간 날, 진수는 일어나자마자 고모의 매서운 불호령을 들어야만 했다. 할머니가 통장과 돈 15만 원을 도둑맞았는데 아빠와 할머니가 진수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전날 친구들과 놀았던 진수는 할머니의 돈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애꿎은 일로 의심을 받으니 너무 억울했다.
아니나 다를까 돈은 할머니 서랍에서 발견되었고, 고모는 멋쩍게 사과를 했다. 화를 내야 하는데, 화를 낼 수 없었다. "전과"는 가족도 의심하게 할 만큼 무섭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라는 생각에 누구와도 솔직히 고민을 나눌 수 없었다.
하지만 쉼터에서는 나와 비슷한 고민이 있는 형, 동생이 있었다. 자주 투덕거리지만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많이 배웠고 사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앞으로는 정말 바뀌어야겠다는 다짐을 나누기도 했다.
쉼터에서는 센터장님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집에 있는 할머니가 자주 떠올랐다. 진수에겐 어렸을 때부터 키워주신 할머니가 엄마 같았다. 일 년 전부터 집을 밥 먹듯이 나갔지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진수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전화를 했었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에, 형까지 집을 나갔을 때, 할머니에겐 진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진수는 유치장과 법정을 오가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할머니를 만났지만, 할머니에게 미안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쉼터에서는 매일같이 할머니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는다. 아빠가 술을 줄이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었다.
아빠가 변했다는 소식을 듣고 쉼터에서 나갈 땐 다른 모습으로 가족을 마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쉼터에서 들은 칭찬은 진수가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더 갖게 했다. 쉼터에서는 매주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게 시켰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대충했었는데, 한 번 집중해서 써본 글에 선생님이 감탄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읽고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생전 처음 들어본 칭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