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동학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 풍남문(豊南門)의 1977년 현재 모습. 사진 출처 : <한국백년>.
<한국백년>
'보부상(褓負商)'이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친 이름으로 가내수공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물물교환을 이어주는 행상인을 말한다. 전국에 수백명 씩의 조직을 갖고 동학혁명기에는 관의 첩자 노릇을 하였다.
농민군은 곧 현아(懸衙)를 습격하여 형방에 갇혀 있는 6명의 죄수를 석방하고 군기고를 파괴하여 많은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어서 현감의 가사(家舍)와 도사령(都使令)의 집을 아울러 타파하고 이 곳 보부상들이 주접하는 집을 불질러 보부상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이날 밤 고부군 삼거리로 옮겨 숙영하였다.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 동학군이 재빨리 정읍을 공격한 것은 이어서 곧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4월 5일 (음) 군산에 상륙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4월 7일 (음) 경군을 거느리고 전주로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다 화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 관아에 비치되어 있는 무기를 접수하여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라도 서해안 여러 군현으로 진군의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이같은 목적 아래 4월 7일 (음) 삼거리에 유한 동학농민군은 4월 8일 전봉준의 인솔 아래 흥덕읍으로 진주하였다. 흥덕읍으로 진주한 이들은 그 곳 군기고를 파괴하고 탄약과 창검 · 조총을 무난히 접수한 후 정오경에는 다시 고창으로 진주하였다.
이들은 고창읍의 옥문을 파괴하고 억울하게 감금되어 있는 동학교도 7명을 석방하였다. 또 이들은 읍저(邑底)에 있는 부호 은대정의 집으로 몰려가 가옥을 파괴하고 소각한 다음 무기를 접수하고 장적(帳籍)을 수험(收驗)하였다. 이어서 고창 현아 각 건물을 파괴하고 인부(印符)를 탈취하려 하자 현감은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다. 농민군은 그날 고창읍내에서 머물렀다. (주석 2)
주석
1> 이이화, 앞의 글.
2> 김의환, 『전봉준전기』, 95~96쪽, 정음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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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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