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장군의 절명시사발통문을 작성하고 봉기를 일으켰던 대뫼마을 동학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봉준 장군의 절명시
김광철
동학농민혁명군은 접전을 앞두고 농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위하여 여러 가지 홍보전을 전개하였다. 당시의 여건상 사발통문을 통해 알리는 방법이 채택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두 번째 공포한 통문이다.
통문 (2)
오늘 우리의 의거는 위로는 종사를 보호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자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이니, 놀라지 말고 차례로 우두머리들은 와서 회개할지어다.
전운영이 이민들에게 끼치는 폐단과 균전관의 거폐생폐(去弊生弊)와 각 시정의 분전회수와 각 포구의 선주늑탈과 타국 밀무역상들의 무역과 소금의 시장세와 각종 물건의 도매상의 폭리와 백지징세와 송전기진(松田起陳)과 고리대의 발본 등 많은 폐악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우리 사농공상의 사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은 동심협력하여 위로는 국가를 돕고 아래로는 빈사의 민생을 편안케 하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주석 4)
동학농민군의 사기는 충천했지만 막상 무기는 형편없이 열악하여 화승총과 칼ㆍ죽창이 전부였다. 반면에 관군은 나름대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 보부상을 풀어 정보를 취하고 있어서 농민군의 무장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황토현에서 승전한 동학농민군지도부는 전투에 앞서 다시 한번 전의를 다지고 기의(起義)하게 된 이유를 방문(榜文)을 통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