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합의로 현장에 들어간 동료들지난 2018년 12월 31일 71명의 해고자들이 공장으로 복직했다. 2020년 1월 3일은 남은 47명이 모두 공장으로 복직하는 날이었다. 기업노조와 회사는 일방적으로 복직을 미룬 합의서를 통보했다.
고태은
'해고 당한 지 10년이면 그동안 어디 나가서 가족들 먹여 살릴 생각을 해야지, 왜 아직도 복직을 외치고 있냐'는 말들이 여전히 나온다. 해고자들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말은 해고자들의 지인들로부터도, 서로에게서도, 아니 사실은 스스로도 많이 외쳤던 말이다. 2009년 파업 당시 많은 이들은 회사와 회사 안 동료들에게 정이 떨어져 다시는 오고 싶지 않다며 희망퇴직을 쓰고 떠났다. 희망퇴직을 쓰지 않았더라도 파업 이후에 연락을 끊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해고 2년 후부터, 지부는 남은 사람들이 복직 투쟁을 할 테니 미안해말고 가족들 책임지러 가라고 했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으므로 가족을 책임져야 해서 혹은 투쟁에 상처받아서 조합원들은 각지로 떠났다.
2009년 해고 이후 해고자들은 그냥 살아지지 않았다. 파업이 끝난 후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직금은 가압류 금액으로 잡혔다. 많은 이들이 구속되었고, 구속되지 않은 사람들도 백여 명이 1년 가까이 무작위 소환조사로 인해 제대로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다.
지난 국가폭력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에도 나왔듯 2009년 쌍용자동차 파업 때 이명박 대통령의 승인 하에 조현오 당시 경기도 경찰청장의 지시에 따른 과잉진압이 있었다. 크레인에 달린 컨테이너 박스에서는 특공부대가 가득 실려 내려왔고, 조합원들은 그 크레인에 실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맞았다. 파업 후 구속수사 중에 치료를 요구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분노는 쌓였고, 마음에도 멍이 들었다. 어떤 동료는 파업 당시의 환각에 아직도 휩싸여 산다.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하루, 일주일이 무섭게 사람이 죽었다. 당사자도, 아내도, 뱃속의 아이도 죽었다.
그래도 살아보려 했다. 많은 이들이 건설 노동도 하고 평택항 항만에서 일용직 노동도 했다. 택시도 몰았고, 화물차도 몰았고, 공사장 크레인도 몰았다. 자동차 부품사에 들어가 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쉽지 않았다. 회사가 약속했던 일자리 면접에서는 '도장 공정하다 페인트 통에 질식해 죽을 수도 있는데 일하겠냐'는 협박이 대놓고 나왔다.
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평택을 떠났거나 쌍용자동차에서 일했다는 것을 숨겼다고 했다.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2008년부터 제대로 나오지 않던 임금으로 이미 파산 직전이었는데, 그래도 회사를 살려보겠다며 사둔 차 빚도 갚고, 투옥되고 조사받는 동안 생긴 빚도 갚으려 했다. 원래 받던 임금보다 못한 수준이어도 애써서 버텼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동료들의 죽음 소식이 들렸다. 이렇게 나만 살아있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잔인한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각자가 기억하는 동료들의 죽음은 다르다. 그렇지만 2009년 정리해고 이전에 공장 안에서 함께 밥을 먹고 일했던 동료들이 나처럼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생각하다 들려온 소식이 죽음이라는 것이 이 투쟁을 포기 못하게 했던 것이다.
어떤 이는 하청 공장에서 일하다 과로사로 사망했고, 어떤 이는 먼저 간 아내 몫까지 아이를 키우며 일하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떠나게 됐고, 어떤 이는 연탄불을 피워 자살했다. 이렇게 많은 당신들이, 왜 허무하게 가야 했나 생각해보면 '정리해고'라는 삶에 잘못 끼워진 단추가 다시 끼워져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복직해서 공장 안에 들어가 하루라도 일하고 관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무도 지나간 시간을 책임져주지 않지만, 복직으로 공장에 돌아가 일하는 것으로 거리에 나앉았던 시간을 바로잡고 싶었다.
다시 손에 손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