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안내판박재혁 의사가 투탄을 한 옛날 부산경찰서 자리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이병길
2019년은 3.1만세운동과 의열단 창단 100년이 되는 해였다. 3월에서 시작하여 11월에 독립운동 100주년 행사가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12월 26일 부산 중구청에서는 올해 마지막으로 <박재혁 의사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 안내판>을 세웠다. 겨울비가 오는 가운데 제막식도 없이 조용히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의열단장 김원봉은 잘 알아도 다른 의열단원을 잘 모른다. 또 부산에서 최초로 의열단의 성공적인 의거가 있었음도 잘 모르고 그 주인공도 잊고 있다.
식민통치의 상징이자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경찰서는 당시 의열단의 5파괴 대상의 하나였다. 부산 동구 범일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재혁(1895~1921)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 때에는 《동국역사》 등사 배포사건과 비밀결사 단체인 〈구세단〉에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당시 부산 범일동과 좌천동의 정공단 거리에서 살았던 그의 친구들은 훗날 항일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남겼다. 최천택, 오택(오재영), 김영주, 김인태, 왕치덕, 김병태 등이 그들이다.
박재혁은 졸업 후 상해, 싱가포르, 부산 등을 왕래하며 무역사업과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그는 노모와 어린 여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1920년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자금과 폭탄을 받고 1920년 9월 부산에 돌아왔다.
1920년 9월 14일 오후 2시 30분경 박재혁 의사는 당당하게 조선옷을 입고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향해 폭탄을 던져 경찰서 일부를 폭파하고 서장 등을 부상시켰다. 이것은 의열단 최초로 성공한 의거였다. 당시 일본 신문은 "동경의 한복판에 투탄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상처를 입은 채로 체포된 박재혁 의사는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박재혁은 옥중에서 단식하다가 1921년 5월 11일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7살이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