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3월 10일 안중근 의사가 두 아우와 홍석구(빌렘) 신부를 면회하면서 유언을 남기고 있다.
<영웅 안중근> / 눈빛출판사
독립운동 명문가로 흔히 거론되는 집안은 경주 이씨, 우당 이회영 가문이다. 이 집안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 이항복 이래로 10대를 내려오면서 딱 한 대(代)만 빼놓고 대대로 과거급제 하고 재상급을 대거 배출한 것에 더해 상당한 경제력까지 축적해 '삼한 최고 가문'이란 의미의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불렸다.
좋은 의미로 갑(甲)이었던 이 가문은 나라가 망한 1910년 말부터 1911년 초까지 가족 성원 59명을 만주로 집단 이주시켜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착한 '갑질'을 계속 이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이 땅에서 갖고 있던 지위와 재산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동족을 위한 희생의 길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당 가문보다 숫자는 적지만 그에 못지않은 명문가가 또 있다. 독립운동사를 읽다 보면 이 가문 사람들이 심심찮게 등장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명문가로 얼른 묶어내지 못한다. 이것은 그 집안의 '한 사람'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나머지 가족들이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순흥 안씨, 안중근 가문이 바로 그 집안이다.
이 가문에서는 안중근을 비롯해 안정근·안공근·안명근·안경근은 물론이고 자녀 세대인 안춘생·안봉생·안락생과 안명근 매제 최익형, 안춘생 부인 조순옥 등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안중근·안정근·안공근은 안태훈의 아들이고 안명근·안경근은 안태훈의 형인 안태현의 아들이다.
독립운동사에 관한 책들에서 성은 '안'이고 끝 이름은 '근'인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안중근의 강력한 이미지에 사로잡힌 우리 한국인들은 안중근에만 주목하고 이 가문 전체에는 주목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가문 역시 이회영 가문 못지않게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다.
안중근 가문은 독립운동을 수행한 기간도 길고 수행한 방식도 다양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시작했을 뿐 아니라, 무장투쟁(의열투쟁) 이외의 방식에도 참여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0권에 실린 오영섭 연세대 연구교수의 논문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정리한다.
"안중근 가문의 독립운동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후부터 1945년 8월 해방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의 독립운동은 교육운동, 강연 활동, 학회 활동, 의병항쟁, 의열투쟁, 외교활동, 유일당 운동, 특무공작, 독립단체 운영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폭넓게 펼쳐졌다."
제2의 안중근 사건?
이 가문의 독립운동 중에서 109년 전인 1910년 이맘때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다.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주도한 안악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태어났고, 안명근은 보름 뒤인 17일 태어났다. 일부 논문이나 인터넷 사전에는 안명근이 9월 2일 출생했다고 적혀 있지만, 국가보훈처가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안중근은 9월 2일, 안명근은 9월 17일 출생한 것으로 표기돼 있다.
바로 이 안명근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을 1910년 12월 27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고 일본 측이 주장하면서 1911년 1월부터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수록된 이 사건의 중심에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있었던 것이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는 안명근이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아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보름 먼저 태어난 사촌형이 안명근의 정신과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안명근은 처음에는 교육운동에 중점을 뒀다.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역량 강화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그래서 일어난 일이 바로 안악 사건이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바로 이것이다.
안명근이 계획한 일은 군자금 모집이지만, 일본은 이를 총독 암살미수로 조작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빌미로 독립운동가들을 대거 체포했다.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 700여 명이고 재판소까지 증축해야 했을 정도로 대형 사건이었다. 그중 122명이 기소되고 105인이 유죄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105인 사건으로도 불린다.
일본은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철교 준공식 참석차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상하는 기회를 틈타 독립운동가들이 경의선 주변인 평양·선천·정주·신의주 등지에서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기차역 주변에서 거물급을 암살하는 방식은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년 전 사건과 흡사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했던 방식을, 이듬해 12월 27일 안중근 사촌동생 안명근이 답습했다고 일본이 주장했던 것이다.
안명근 사건을 '제2의 안중근 사건'으로 꾸미는 시나리오는 당시로서는 꽤 그럴싸해 보였다. 암살 방식이나 암살 대상이 비슷할 뿐 아니라 암살 행위자의 이름도 비슷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동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1집에 실린 '안명근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란 논문에서 "일제는 안명근 사건을 '제2의 안 의사 사건'으로 주목하고 탄압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당시 안명근 사건에 대해 미주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는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신한민보> 1911년 5월 3일자는 '제2의 안 의사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는데, 안명근 사건에 대한 한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측 주장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에도 안명근 사건이 제2의 안중근 사건으로 비칠 만했던 것이다. 일제의 조작이 매우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안명근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5년 뒤 출소했다. 그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7년 7월 7일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