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한끼줍쇼> 방송 화면
JTBC
그럼에도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
"작은 배가 말한다. '잡아당기지 마세요. 누르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하나 달라요. 하나하나 걸리는 시간도 달라요. 그러니까 빨리빨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작은 배는 또 말한다. '우리는 크기가 달라요. 우리는 모양도 달라요.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마음이 작아져요. 마음이 작아지면 떨려요. 마음이 떨리면 몸도 작아져요.'" - <빨리빨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중에서
언젠가 우연히 이 그림책을 보며 울컥했다. 그 이후로 마음이 조여 올 때마다 이 책을 꺼내본다. 나를 채근하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실제로 난 올 한 해 작년보다 많이 웃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도 많았다. 올해는 그런 면에서 특별했다. 그래서 내년에도 올해처럼 살고 싶었으나 나의 소박한 목표를 흔드는 야속한 일은 늘 생기기 마련이다.
올해의 끝자락에 함께 일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피디로부터 방송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인즉슨, 수입도 반토막이 난다는 뜻. 가뜩이나 쥐꼬리만한 원고료였는데 거기서 반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이런 일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루 아침에 전격적으로 일어난다. 청취율이라는 호환마마 보다 무서운 존재 앞에서 떨어진 청취율을 만회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할 때, 방송 작가의 생존권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겪어온 일인데도 불구하고 겪을 때마다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다시 한 번 흔들리는 나의 생존권 앞에서 슬금슬금 고민이 고개를 들고 올라왔다.
나는 과연 내년에도 같은 목표를 지킬 수 있을까. 많이 일하지 않고 적게 버는 삶이 주는 여유를 계속 지속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쓰다 버리는' 존재로 취급을 당해도 방송 작가로서의 책임감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런 생존 조건 안에서 작가는커녕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킨다는 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지 의구심이 든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위로했던 꿈,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지 않겠다는 목표 아래서 평안하고 충만한 2019년이었는데, 다시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될까 봐 아니 애를 써야만 하는 상황이 될까 봐 겁이 났다.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사람한테 참 너무한다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되겠다니까 호구로 아나 싶기도 해서 '빌어먹을 세상', 하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지금까지의 경험상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된 채로 잘 살았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을 지키고 싶다. (잘 쓰진 못해도 계속 썼던) 꾸준함,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어 조급해 지긴 했어도) 오히려 애쓰지 않은 올 한 해 동안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경험, (시기심과 좌절감 사이를 분주히 오가다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덜어내고 받아들인 내 자신,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돈이 없어도 여유로웠던 마음, (기대했던 내가 아니어도) 나를 좋아하고 인정하고자 노력했던 마음 같은 것들.
또 소박하다 하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작은 가능성을 격려해 주고 싶고, 더 나아지기 위해 호기심을 갖고 배우고 싶고, 주어진 기회 안에서 능력을 펼치고 싶다. 내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힘껏 응원해 주고 싶다.
빨리빨리라고 말하지 마세요
마스다 미리 (지은이), 히라사와 잇페이 (그림), 김난주 (옮긴이),
뜨인돌어린이,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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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리 말대로 살려고 했는데... 이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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