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민청련 탄압에 맞서 고문수사를 규탄하는 농성을 하는 민청련 간부들의 부인들
푸른역사 제공
그러나 민청련의 역사가 이런 소소한 무용담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청련이라는 이름 뒤에는 남영동·치안본부·안기부·취조실·고문과 같은 독재의 유령들이 항상 쫓아다녔다. 책에는 민청련 지도자 김근태와 이을호 등 고문 피해자들과 수배자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곳곳에 그려진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야수적인 고문과 반인권적인 탄압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준 가족애와 동료애, 그리고 인간의 위대한 신념에 대한 이야기들이 독자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 민청련은 1987년 6월 항쟁의 산파역을 도맡을 수 있었다. 6월 항쟁의 역사는 대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나, 국본 출범의 모태가 된 재야의 민통련, 야당의 민추위 등을 줄기로 하여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야와 야당 조직의 '허리'를 이룬 사람들 중 대다수가 민청련 출신의 30~40대 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의 사상적 뿌리와 조직적 활동의 모체는 민청련에 있었다.
그런 점에서 민청련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복원한 이 책의 성과는 1987년 6월항쟁의 역사를 풍부화하는 성과이며, 나아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이론사·조직사·인물사를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이 1988년 이후 1992년 민청련이 해소되기까지의 시기를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집필 초기 기획된 민청련 회원 자녀들의 이야기 '민청련 가족사'가 추후 과제로 미뤄졌다는 점 또한 아쉬움을 더한다.
민청련의 고난은 곧 가족들의 고난이기도 했으며, 자아가 형성되던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의 수배·고문·투옥은 그들의 우주를 뒤흔든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디 이 책이 독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아 이 두 가지 과제 즉, 민청련을 중심으로 한 1990년대 민주화운동사의 서술과 민주화운동 가족사의 집필이라는 후속작업으로까지 꼭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화두로 던졌던 김용현씨의 이야기로 돌아가 글을 마치고자 한다. 김용현씨의 사연이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은 그가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과거의 인연들에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울림을 준 것은 김용현씨가 감독과 나눈 필답이었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휠체어에 의탁한 그에게 '왜 그런 삶을 살았느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어눌해진 말 때문에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대신해야 했던 그의 대답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젊었던 민청련 회원들 역시 김용현씨처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많은 동료들이 온갖 고초를 당해 건강을 잃거나 병을 얻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많은 민청련 회원들은 여전히 이름없는 우리의 이웃으로 지하철 옆 자리에, 아파트 주민대표 회의장에, 동네 생활협동조합에, 그리고 투표소 선거 대기줄의 맨 앞자리와 촛불집회의 맨 뒷자리에 우리들과 함께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이제는 거의 반백이 된 초로의 아저씨·아줌마들이 촛불집회가 끝난 뒷풀이 자리에서 함께 촛불을 든 자식뻘 되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무용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민청련이 먼저 간 동지들에 바치는 조사(弔詞)이자, 스스로의 역사를 정리한 집단적 자서전임과 동시에 후대에게 전하는 비망록이다.
민주화운동 세대에 대한 날선 감정들이 유령처럼 사회를 배회하는 요즘, 땀과 눈물로 써 내려간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찬찬히 되짚어 보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청년들, 1980년대에 맞서다 -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민청련 이야기
권형택, 김성환, 임경석 (지은이),
푸른역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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