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홍콩 중앙정부청사 앞에서 5대 요구안 수용을 위해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고 있는 현장.
이희훈
홍콩 시위에 대한 해석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결론은 돌고 돌아 중국에서 멈췄다. 요컨대, 홍콩 시민의 요구는 정당하지만, 자타공인 세계 최강대국 중국에 맞선다는 건 무모하다는 것이다. 시위 주동자들은 처벌을 받고, 수많은 시민들이 좌절과 냉소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곧, 홍콩 시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홍콩 시위를 주제로 한 수업은 적잖은 깨달음을 주었다. 교과서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가르치지만, 정작 아이들의 판단과 선택은 애초 그와는 별개라는 점이다.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요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시험을 치를 때는 이상에 동그라미치지만, 시험장을 나서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나 몰라라 한다.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이 두루 필요하다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씀도,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꿈꾸자'고 했던 체 게바라의 이야기도, 요즘 아이들은 죄다 이상보다는 현실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는다. 홍콩 시위를 지지하면 이상주의자고, 중국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면 현실주의자다. 이 둘의 경계는 제법 명확하다.
학교에서 20년 넘도록 아이들 앞에서 이상을 가르쳐왔다고 자부했는데, 되레 그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거듭 났다. 물론, 그들을 나무랄 순 없다. 일개 교사의 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십여 년 간 받아온 학교 교육의 힘은, 아이들이 그동안 경험한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이라는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오롯이 증명할 뿐이다.
홍콩 시위에 대한 아이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침묵'이다. 지지를 표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경우라면 그저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수라는 뜻이다. 혈기 왕성한 세대답지 않게, 모르는 척 입 다물고 있는 우리 정부와 기업들의 중국에 대한 저자세를 아이들은 적극 두둔하고 옹호하고 나섰다.
듣자니까, 얼마 전 몇몇 대학생들이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인상 요구에 반대하며 주한 미국 대사관을 월담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비록 담을 넘은 행위 자체는 현행법 위반일지언정 정의감의 발로에서 나온 행동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들은 직접 실천으로 옮긴 것일 뿐, 솔직히 마음속으로야 당장이라도 달려가 담을 넘고 싶은 국민들이 대다수다.
그런데도 지엄한 국법은 그들을 잡아다 철창 속에 가두었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서둘러 구속시킨 것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대한민국 공권력의 가혹한 조치다. 오로지 미국의 심기를 경호한 과잉 대응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유다.
평등과 호혜를 바탕으로 유지되어야 할 동맹 관계를 오로지 돈으로 환산하는 미국 대통령의 행태에 우리는 언제까지 주눅이 든 채 굽실거려야 할까. 한낱 대사가 주재국의 대통령을 두고 종북좌파 운운하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에 또한 언제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저 냉혹한 국제 질서라고 눙치기에는 국가적 자존심에 난 생채기가 너무나 크다.
수업이 끝날 즈음, 맥락상 홍콩 시위와 유사하다 싶어 미국 대사관 월담 사건을 잠깐 소개했더니, 아이들은 뜬금없이 우리가 미국 앞에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대꾸했다. 지는 해인 미국의 눈치를 살필 일은 얼마 남지 않았고, 앞으론 중국 앞에서만 납작 엎드리면 된다는 거다.
"어차피 중국이든 미국이든 우리에겐 동맹국이 아니라, 종주국일 뿐이에요. '미중 교체기'에 눈치껏 적절히 처신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죠."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 '처세의 달인'을 자처하는 아이들이 늘어만 가는 현실이 씁쓸하다. 미국 대사관의 담을 넘은 대학생들의 결기에 외려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호혜와 평등, 공존과 상생을 외친 그들의 신념과 진심은 존중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겐 더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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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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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에 고등학생들이 '침묵'으로 일관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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