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에서 발언하는 트럼프 대통령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영국 왓퍼드의 그로브 호텔에서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 사무총장과 함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실무오찬에 참석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주한미군 방위비 협상과 미국산 무기 거래를 연계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 미국 정부에서 흘러나왔다. 발언의 진원지는 케빈 페이히 국방부 조달담당 차관보다.
워싱턴 시각으로 10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주최한 한미동맹 커펀런스에 참석한 페이히 차관보는 "한국이 상당한 규모로 미국산 무기를 사들이는 것이 한미 방위비 협상에서 옵션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늘 합의를 추구하는 협상가"라면서 "그런 가능성에 귀를 기울일 거라고 본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이 분담금 5배 증액 요구를 들어주지 않더라도 미국산 무기 수입을 늘려주면 협상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발언이다. 페이히 차관보는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을 직접 챙기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부 차관이 임의로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 한국민의 반발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진 방위비 협상을 그런 방법으로라도 돌파하려는 트럼프의 의지를 반영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출마 의지를 공식화할 즈음인 1987년(41세)에 출간한 <거래의 기술>에서 트럼프는 "나는 크게 생각하기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협상 노하우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대개 사람들은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 일을 성사시킨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때문에, 규모를 작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소개했다. 자기는 목표치를 높게 설정해놓고 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조건 높게만 설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목표치를 높게 잡는 자기를 보고 도박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했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으면 막상 일이 닥치더라도 견뎌낼 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트럼프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속한 북미 및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도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하고 있다. 과도한 분담금 증액을 관철시켜 미국의 국가 재정난을 어느 정도 해소하게 되면, 내년 대선뿐 아니라 당장의 탄핵 국면에서도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 그래서 방위비 협상에 사활을 걸면서도, 한편으로는 최악의 경우도 동시에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는 것은 방위비가 동결되거나 약간만 오르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거래의 기술>에서 그는 목표치를 높게 정하되 최악의 경우도 함께 감안한다고 한 뒤, 상황 변화에 대비해 여러 개의 카드를 동시에 준비해둔다고 말했다. "최소한 대여섯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일을 추진시킨다"며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더라도 무엇인가 복병이 될 만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언제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그가 방위비 협상에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무기 구입 요구'뿐 아니라 다른 카드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이 미국에 바라는 것들에 대해 그가 주목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산 무기를 이미 많이 구입하는 나라, 한국
그런데 방위비 분담금을 다섯 배 인상해달라는 요구만큼이나, 더 많은 무기를 구매해달라는 요구 역시 무리하기는 매한가지다. 국방기술품질원이 올해 1월 23일 발간한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서 충분히 강조됐듯이, 이미 한국은 미국산 무기를 지나치게 많이 구입하는 나라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의 10개년 동안 한국이 수입한 미국산 무기는 67억 3천 달러어치로, 원화로 환산하면 7조 6천억 원이 넘는다. 그 10년간 1년 평균 7600억 원어치를 수입한 셈이다. 2019년도 방위비 분담금은 1조 389억 원이지만, 2009년 분담금은 7600억 원이다. 2009년을 기준으로 하면, 해마다 방위비 분담금만큼의 돈을 들여 미국 무기를 사들였던 것이다.
같은 10년 동안 한국보다 더 많이 구매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106억 3900만 달러)와 호주(72억 7900만 달러)뿐이다. 일본은 한국의 절반 수준인 37억 5200만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미국의 군사 동맹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나토 회원국들 중에도 한국처럼 많이 팔아주는 나라가 없다. 또 대규모 미군을 주둔시킨 나라에서 한국처럼 많이 구입하는 나라도 없다. 사우디에는 300명 정도의 미군이 배치돼 있고 호주에는 3천 명 정도가 주둔해 있다. 대규모 미군이 배치돼서 방위비 분담금을 많이 내는 것에 더해 미국 무기까지 많이 팔아주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는 것이다.
미군이 많이 배치돼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안보에 긴요한 곳이라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미군의 배치를 허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은 한국에 감사해야 한다. 거기에 더해 미국 무기까지 많이 팔아주고 있으니, 감사에 감사를 거듭해서 표시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무기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8년에 <국제통상연구> 제23권 제1호에 실린 '세계 무기시장에서의 무기거래 결정 요인'이라는 하광룡의 논문에서 "미국의 무기 수출 비중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항상 압도적이었다"면서 "미국은 가장 낮은 시기에도 세계 무기 수출액의 25%를 차지했으며, 미·소 냉전이 종식되며 군비 축소가 절정이던 1990년대 초반에는 무려 60% 수준에 이르기도 하였다"라고 말한 데서도 나타난다.
한국은 2008~2017년에는 3위를 기록했지만, 2006~2010년에는 미국 무기 수출액의 14%를 수입해 1위를 기록했다. 2011년에는 그 비중이 20%를 넘었다. 무기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한테서 이 정도로 무기를 많이 샀으니,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한없이 고마운 나라여야 한다. 그런데도 자꾸 손을 내밀며 한국 국민들의 혈세 부담을 증가시키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인들은 고객에 따라 전략을 바꾼다. 많이 팔아주는 고객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트럼프는 한국을 우대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거래의 기술'을 구사하면서 한국을 이리저리 압박하고 있다. 답답함에 더해 분노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진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