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6월 14일 새벽 5년 8개월동안의 해외 도피를 마감하고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오마이뉴스 권우성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대우의 '세계경영' 신화가 굳건하던 시절부터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김 전 회장의 공과에 대한 논란은 아직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의 경영방식에는 외환위기를 초래한 우리나라 재벌체제의 모순이 그대로 농축돼 있었다는 비판이 여전하다. 정경 유착을 통한 방만한 차입경영, 대마불사를 앞세운 문어발실 사업 확장, 이로 인한 천문학적 부채로 사상누각을 쌓았다는 지적이다. 결국 41조원 규모의 회계부정을 저지르고 그룹이 무너지면서 우리 경제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다.
대우가 남긴 부채 60여조원은 금융기관의 부실을 불렀고 기업들의 연쇄도산으로 이어졌다. 국민 혈세인 30조원의 공적자금까지 투입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대우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고통을 당했고, 대우에 투자했던 소액주주들은 주식이 휴지 조각으로 변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1980년대만 해도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통했다. 1967년 서울 충무로에 있는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5명의 직원,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실업을 세우면서 '대우신화'는 시작됐다. 셔츠와 내의류를 동남아에 수출하던 대우실업은 1970년대 조선·자동차 등 중공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한국기계공업, 옥포조선, 새한자동차 등 부실기업을 인수·합병해 덩치를 키웠다.
1990년대 들어서는 '세계경영'을 발판으로 창업 30여년 만에 재계 2위 그룹으로 도약했다. 1999년 해체 직전 대우그룹은 자산 83조원, 매출 62조원에 국내 계열사 41개와 국외법인 396개를 거느렸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작동하던 당시 경제상황에서 대우그룹의 몰락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계경영'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무리한 차입을 통한 외형 확장은 몰락을 자초했다. 기술과 품질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 무리한 확장에만 몰두한다는 우려는 현실이 됐다. 당시 우리나라 재벌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던 견제와 균형이 없는 '황제식 경영'과 '빚더미 경영'은 IMF 외환위기 속에 그 민낯을 드러냈다.
재계 2위 그룹으로 도약시킨 세계경영, 몰락의 씨앗
이어진 해외도피, 분노한 노동자들의 '체포결사대'
게다가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가 닥치자 다른 재벌들이 과잉중복투자 해소를 위한 사업구조조정에 돌입한 것과는 반대로 수출을 통한 외환위기 극복을 외치며 무리한 외형 확장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당시 김대중 정부 경제 관료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는 정치권 압력에 의한 대우그룹 기획 해체라는 음모론으로 이어진다.
대우 해체 당시인 1999년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던 고 강봉균 전 의원은 과거 이 같은 대우그룹 출신 정·재계 인사들이 제기하는 음모론을 적극 반박한 바 있다. 강 전 의원은 "대우그룹의 해체는 정책당국자들의 판단에서 초래된 결과라기보다는 시장의 신뢰를 상실한 김우중 회장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였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