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제3차 회의가 열리는 지난 11월 1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한국국방연구원 앞에서 민중공동행동 회원들이 협상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희훈
방위비 분담금을 놓고 한·미 양국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가 이따금씩 삐져나오고 있다. 지금의 갈등이 미군 철수로 귀결될지 모른다는 우려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에서 언론홍보 차장을 지낸 적 있는 앤드류 새먼 <타임스> 한국 특파원이 11월 15일자 홍콩 <아시아 타임즈>에 기고한 기사 '트럼프는 미군을 한국에서 빼내고 싶어할까?(Does Trump want to take US troops out of Korea?)'에서도 그런 우려를 읽을 수 있다.
"엄청난 (방위비 분담금) 인상 규모를 고려해볼 때, 일부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남한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내놓음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군을 감축해 본국으로 데려갈 구실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공화당 정권인 아들 부시 행정부 때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한 리처드 아미티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국장을 역임한 빅터 차(한국명 차유덕)가 11월 23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공동 기고한 기사 '66년간의 미·한 동맹, 심대한 문제점에 봉착해 있다(The 66-year alliance between the U.S. and South Korea is deep troble)'에서도 같은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아미티지와 빅터 차는 한국과 중국이 밀착 중인 지금 상황에서 한·미 갈등이 심화되면 미군 철수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 위협과 중국의 지역 패권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미군이 한반도에서 조기에 철수하는 것이 (그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경고다. 또, "트럼프가 방위비 분담금 협상 실패를 미군 감축이나 전면 철군의 빌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은 전망했다.
이런 기사들처럼, 방위비 분담금을 주한미군 철수와 연계시키는 보도들이 계속 나오게 되면, 동아시아 미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상당수 미국인들의 위기감을 자극해(A)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도록 만드는 결과로 연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정반대 결과로 귀착될 가능성도 있다. 미군 철수가 한국 보수파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키고(B) 이로 인해 한국 정부의 협상력이 떨어져, 트럼프가 요구하는 6조원은 아닐지라도 상당 수준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합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A가 미국 여론에 주는 영향보다는 B가 한국 여론에 주는 영향이 훨씬 심대하다. 그렇기 때문에 방위비와 미군 철수를 자꾸 연관해서 보도할수록, 트럼프보다는 한국 정부의 협상력이 좀더 약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까
위 기사들의 경고처럼, 지금 상황이 크게 악화돼서 미군 철수 문제가 가시권에 들어오는 일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미국의 과도한 요구에 분노한 한국인들이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고 평택 미군기지로 모여들어 기지 사용료를 요구하거나 10조 원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미군기지 환경정화 비용을 요구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면, 정말로 그것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관련 기사 :
'미군기지 조기환수에 신중한 트럼프, 그 치명적인 약점').
필리핀 국민들은 1986년 '피플 파워'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친미독재정권을 무너트린 뒤 반미운동을 벌여 1992년에 미군 철수를 관철시켰다. 필리핀은 1976년부터 미군한테서 기지 사용료에 더해 군사 지원까지 받아냈다. 그런 필리핀에서도 쫓겨난 적이 있으므로, 미국이 지금처럼 한국 국민들을 자극하다가는 'again 1992'가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민중이 직접 나서는 경우가 아니라면, 방위비 분담금 문제가 미군 철수로 이어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만족할 만한 분담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해서 미국 정부가 철수를 결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위협을 주려고 소수의 병력을 빼낼 수는 있다. 하지만 철군 수준의 대규모 감축은 쉽사리 단행할 수 없다. 한국이 돈을 대주지 않고는 주한미군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재정이 바닥을 보인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미국이 스스로 철군을 결정할 가능성이 적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현재'와 '과거'가 그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로 미국은 러시아보다 중국을 더 경계했고, 그런 정서가 2017년 12월 인도·태평양 전략의 공식화로 구체화됐다. 이 전략 하에서 미국의 최대 주적은 중국이 됐고, 이에 따라 중국 수도 베이징과 가장 가까이에 미군을 두고 있는 한국의 전략적 비중이 더 높아지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가 한국에서 군대를 빼가는 것은 자신이 수립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진배없다. 태평양을 들어내면 동아시아와 미국이 맞닿는 상황에서,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면 미국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트럼프도 이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이 파기되는 것을 일본 이상으로 염려했다.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방한해서 한국 여론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동맹국인 일본의 입장을 배려하기 위해서, 혹은 일본 앞에서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한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미국 자신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중국 코앞에서 한미일 삼각동맹 혹은 삼각협력이 약화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지소미아 파기가 자국 안보에 끼칠 영향을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나라가, 지소미아보다 훨씬 중대한 주한미군 철수가 자국 안보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지 못할 리 없다. 기지 사용료까지 내면서 필리핀에 주둔한 나라가, 한국이 분담금을 더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군대 철수를 감행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한국 민중이 나서면 몰라도 미국 정부가 나서서 주한미군 철군을 관철시키는 것은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