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관(헌병 간부)들이 총살 집행 후에도 숨이 붙어 있는 일부 사형수를 찾아 권총으로 근접 확인 사살하고 있다.
NARA/이도영
사형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사형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255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형법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경제학자로도 유명한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체사레 베카리아는 1764년 <범죄와 형벌>이라는 저서에서 사형폐지의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사형 유지와 폐지의 입장은 여러 가지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지지자는 응보필벌의 복수가 곧 정의의 실현이며 부수적으로 범죄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반대자는 오판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무고한 사람에 대한 사형은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회복 불가능성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국가가 제대로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사적 복수가 널리 허용되었고 따라서 나와 나의 가족, 나아가 내가 소속된 집단에 가해지는 부당한 공격과 침해에는 복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습니다.
국가체계가 갖추어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살인이 일어나더라도 국가는 그것을 개인 간의 분쟁으로 간주하여 가급적이면 국가형벌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지만 굴복하지 않는 적에 대한 처리 문제를 놓고 국가는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즉, 식량을 비롯한 한정된 자원을 적에게까지 분배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적의 목숨을 단번에 끊는 것이었고, 이러한 조치는 국가의 이름으로 사형이 일상화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을 자신의 신민으로 복속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가가 가지게 되면서, 달리 표현하자면 국가의 통제력 안에 이들을 관리하고 교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게 되자 감옥이라는 감금시설을 고안하게 됩니다. 범죄자 역시 국가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위를 일삼는 적으로 간주되었기에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계몽시대를 지나면서 나타나게 되는 사형의 완화와 폐지의 추세는 국가가 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을 그 통제력 또는 통치 시스템 안에서 규제하고 단속할 수 있다는 검증된 믿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형제도의 유지를 주장하는 국가 논리의 핵심에는 외관상으로 국민적 여론이 전면에 등장하지만, 그 본질은 그만큼 해당 국가의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사형을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대체로 국민을 그의 통제력 안에 둘 수 없음을 자인하거나, 국가의 정치체계가 불안정하거나 민주적이지 아니한 경우들이 대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벌의 외관, 그러나 형벌이 아닌
사형 지지자의 핵심 논거인 복수의 속성은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의 본능적인 보복 욕구의 충족 이외에 정의를 비롯한 어떤 다른 가치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정확히 셀 수조차 없는 사형집행 가운데 이른바 반인륜적인 생명 침해 범죄자들에 대한 집행이 있었고, 지금도 60명의 사형확정자가 생존해 있지만, 국가는 이들을 교수대에 세우거나 세울 것을 경고하는 위협 이외에 이들에 의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유족들을 위하여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형 집행을 통해 유사한 범죄의 발생을 미연에 예방한다는 목적이라는 것도 과거 국가가 사형을 집행할 때마다 일상적으로 관용어처럼 사용했던 말입니다. 그러나 존엄한 인간은, 그가 사형확정자라고 하더라도, 단언하건대 목적 그 자체이지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그 순간에 경험하게 되는 심각한 인간 존엄 말살의 결과를 우리는 역사의 가르침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형벌의 목적은 단순한 보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회복에 있습니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올바른 전제는 진정 어린 반성과 용서와 화해에 있지만, 오래된 역사에도 불구하고 사형은 문명사회의 형벌이 감당해야 할 절반의 기능조차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형벌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형의 치명적 결함: 되돌릴 수 없는 오판의 결과
사형의 가장 큰 폐해를 꼽는다면 그것이 의도되었든 실수에 의하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판단의 오류인 오판을 회피할 수 없으며,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매년 사형을 일정하게 집행해 오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사건뿐만 아니라 일반 형사사건에서도 나타나는 오판 문제가 확실한 정보와 통계적 근거를 토대로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식적으로 일반 형사사건의 오판은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판사로 재직했던 이찬형이라는 분은 독립투사에게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한 후 법복을 벗고 출가하여 평생을 불가에 귀의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법관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이 저지른 오판을 진솔하게 고백한 사례가 없습니다.
2003년 10월 이루어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사형제도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한 113명의 판사들 가운데 69.9%가 오판에 의한 사형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했다고 합니다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과오가 있었음을 인정한 사례는 전무합니다. 우리 법관들의 자질이 다른 나라의 법관보다 뛰어나고 전지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오판에 의한 사형은 결코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천주교인권위원회와 함께 지난해 사형확정자 61명의 판결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형집행이 아니라 병사 또는 자살하여 사라진 사형 확정자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시종일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 수사 과정에서는 물론 재판 과정에서도 제대로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했습니다. 무죄가 의심되는 사정은 남겨진 판결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소중한 가족이 흉악범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사형 폐지를 운운할 수 있느냐고 강변합니다. 그렇다면 그 질문에 당신의 소중한 가족이 흉악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그 무고함의 신원(伸冤)은 누가, 어떻게 해주어야 할 것인지를 되묻고 싶습니다.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