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단식투쟁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자유한국당의 황교안 대표가 추운 야외에서 단식투쟁을 계속하다 8일째 되는 날부터 의식을 잃고 병원에 호송되어 치료를 받고 깨어났다. 29일 공식적으로 단식을 마무리한다고 발표했다. 야당 대표로서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번에는 왠지 빛나 보이지가 않는다.
비교하면 1983년에 야당 지도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감행했던 단식투쟁과 대조가 되는 것이다. 다같은 야당의 최고 지도자이고 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방식으로 단식투쟁을 택한 것인데 그 무게와 공감이 훨씬 덜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은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기도 한다. 대체로 단식투쟁은 정치적 폭압이 지독하여 다른 투쟁의 수단이 없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한다. 또 권력이 대화를 하지 않고 힘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때 저항의 강력한 수단으로 단식투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게 불리할 때 일거에 해결하기 위한 열쇠로서 단식투쟁을 택하기도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명백히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고, 황교안 대표는 두 번째인 것처럼 내세우지만 그보다는 세 번째 경우에 가까운 것 같다.
어쨌든 정치 지도자가 단식투쟁을 할 때는 명분과 타이밍 그리고 결기와 공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중요한 요인들이 잘 결합되어야 단식투쟁은 빛을 발하고 정치적 투쟁으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고생만 실컷하고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얻지 못하는 우스운 꼴을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단식투쟁은 잘하면 상대를 벨 수 있고 잘못하면 자신을 베게 되는 양날의 칼과 같은 조심스러운 투쟁수단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에 맞서 정말 목숨을 건 딘식투쟁을 감행하였다. 1983년 광주항쟁 3주기를 맞는 5월 18일 전격적으로 단식투쟁에 돌입하여 병원에 실려가 위험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23일간이나 단식을 계속하였다. 언론에 보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전두환 독재정권이 놀라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요구를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정치적 승리로 단식투쟁을 마쳤던 것이다. 이후 가택연금이 해제되어 본격적인 만주화투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은 명분, 타이밍, 결기, 공감 등 모든 요인이 잘 결합된 탁월한 정치적 승부수였다. 국민들은 민주화를 갈망했기에 정치적 명분은 최고였고, 광주항쟁 3주기에 맞추어 민주화투쟁을 재기하는 타이밍도 적절했고, 더욱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한다는 본인의 결기도 단호하였고, 국내는 물론 국외의 여론까지 호응하는 등 공감이 매우 컸다. 정말 야당의 최고 정치 지도자다운 명승부를 펼쳐 정치적 승리를 쟁취하였고, 역사적인 민주화투쟁으로까지 자리잡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