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레삽 호수의 수로.
홍성식
이성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누이와 오빠의 관계
고운기의 시가 그려내는 풍경을 요약하면 이렇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 아들은 임종을 위해 집을 찾았다. 그런데 위독한 모친은 부모도, 자식도 아닌 오빠를 가장 먼저 찾는다. 마지막 생의 순간에.
시인은 '엄마의 오빠', 즉 자신의 외숙부를 긴 세월 저편에서 겨우겨우 기억해낸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젊어서 홀로 된 여동생을 찾아와 제사 때마다 서러운 필체로 지방(紙榜)을 써주고는 구석에 앉아 말이 없던 사내. 그 사내의 '말없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된 시인 아들. 그걸 먹먹하게 지켜보는 식구들.
피를 나눠 가진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의 서로를 향한 애틋함. 그걸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다. 이런 문장으로 시가 끝나는 것은.
'친정아버지도 아니고/아이 둘씩 낳아준 두 남자도 아니고//눈이 팔팔 내리던/정월 초하룻날 새벽길 걸어 와/어머니를 데리고 간 남자는/큰 외숙부였으리라 믿고 있다'.
이미 죽은 오빠가 이제 곧 저승에서 만날 여동생의 마지막 길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풍경. 아버지도 남편도 해주지 못한 일을 거뜬히 해내는 이름 '오빠'. 이 시가 주는 울림이 깊고도 큰 것은 바로 이런 '새로운 시선'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합리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피를 나눈 누이와 오빠
남매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실체로 확인한 적은 또 있다. 인도 남부 도시 마이소르의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다.
젊은 관광객 네댓 명이 예쁘장한 인도 소녀에게 농담을 걸며 사진을 찍자고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자신이 할 말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서툰 영어로 싫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소녀. 그걸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는 청년들.
소녀의 오빠로 추정되는 17~18세 소년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사내들 가운데로 나서며 "꺼져!"라고 일갈하는 '소년 오빠'의 눈빛에서 살의가 번득이고 있었다.
외국인에게 한없이 친절한 인도 사람에게서 그처럼 무서운 기운을 느낀 건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기세에 눌려 소녀 곁에 있던 청년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상황이 정리되자 여동생의 손을 잡고는 거리 저편으로 총총히 걸어가는 오빠의 등이 세상 무엇보다 든든해 보였다. 하이에나 무리에게서 새끼를 구한 수컷 사자 같았다.
세상 가장 소중한 친구는 바로 남매가 아닐지
몇 해 전에도 한 장의 사진이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적이 있다. 저 먼 곳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쏘아댄 총탄에 조그맣고 가난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
신발도 신지 못한 3~4살 여자 아기가 폭음에 질려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그 역시 고작 6~7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웅크린 여동생의 어깨와 등을 꽉 끌어안고 있는 모습.
카메라는 자신이 먼저 총에 맞아도 좋다는 어린 소년의 처연한 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있을까. 그는 분명 오빠였을 터.
"세상이 주는 고통과 서러움을 함께 나누라고 신은 자매와 형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서술엔 무신론자도 감동시키는 힘이 담겼다.
때론 곁에 있는 오빠와 여동생, 형과 누나가 밉거나 싫어질 때가 있다. 사람이란 게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럴 때면 위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바꾼다.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 그게 형제와 자매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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