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9일, 129구의 장례식이 거행된 이날 이후 '망월동'은 광주민중항쟁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이름이 되었다.
5.18기념재단
5ㆍ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가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주석 2)
계엄사의 발표를 믿지 않는 것은 계엄사와 육군본부, 국보위 보고 자료 등이 모두 다르고 실제와도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5ㆍ18 기간 동안 발생한 시위자 및 시민들의 피해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사망자의 경우 당시 계엄사령부는 사망자를 144명으로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육본 153명, 국보위 보고 자료 158명, 육본 「소요진압 교훈집」 162명 등으로 다르게 명기하고 있다.
그리고 부상자는 계엄사령부 127명, 육본 127명, 국보위 보고 자료 321명, 육본 「소요진압 교훈집」 377명 등으로 집계하고 있다. 하지만 군의 폭력을 직ㆍ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군의 발표와 기록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주석 3)
"공수부대원들은 처음부터 사상자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 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주석 4)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기독교 목사인 아놀드 A, 피터슨은 사망자 수를 800여 명으로 추정한다.
"그와 내가 최근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그 항쟁 동안 광주에 거주했던 한국군에서 일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 따르면 조사당국자들은 사망자 수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했다." (주석 5)
한국현대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현대사』(창비, 2004)에서 "5월 21일에 이르러서는 광주지역의 수십만 시민들이 군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냈고, 그후 5일간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원회가 이 도시를 통제했다. 이 위원회는 500여 명이 이미 죽었고 약 960여 명이 실종되었다고 확인했다."라 쓰고, '각주'에서 이 "수치는 하비(Pharis Harvey) 목사가 이끄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감시단체인 '한국 인권 감시 북미연맹(North America Coalition On Human Rights in Korea)'에서 1980년 9월에 집계한 것이다."라고 소개하였다.
정확한 사망자 등 피해자는 앞으로 진행중인 특위에서 밝혀야 할 과제이다.
한 연구가는 "전체적으로 5ㆍ18 관련 인적 피해 규모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5ㆍ18 관련자에 대한 2006년 제5차 보상 때까지 광주시가 인정한 관련 피해자 규모가 사망 166명, 행방불명 64명, 부상 3,139명, 구속 연행 훈방 등 503명을 합해 3,860명인 점에 비추어 대체적인 그 피해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주석 6) 라고 추정했다.
주석
2> 여성신문사편집부, 「조아라 : 나는 아직도 광주가 생생합니다」, 『이야기 여성사 : 한국 여성의 삶과 역사』, 강준만, 앞의 책, 159~160쪽, 재인용.
3> 정재호, 앞의 책, 133쪽.
4> 강준만, 앞의 책, 160쪽.
5> 아놀드 A, 피터슨, 정동섭 옮김, 『5ㆍ18광주사태』, 171쪽, 풀빛, 1995, 강준만, 앞의 책, 160쪽, 재인용.
6> 정재호, 앞의 책,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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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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