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리시는 엄마의 옛날 고향집
강은경
엄마는 미닫이문 한 짝까지 빠트리지 않고 꼼꼼하게 그렸다. 본채와 사랑채, 헛간과 뒷간까지 건물을 다 그리고는 빙 둘러 나무와 꽃을 심었다.
"여기 주욱 복숭아나무가 있었어. 참죽나무 몇 그루가 여기에 섰었어. 여기는 봉숭아니 채송화니 꽃들이... 여기에 또 큰 살구나무가 있었어. 복숭아나무들이 있고, 여긴 큰 배나무가 있었어. 독배라고... 사과나무, 매화꽃나무, 모과나무가 여기 있었고. 함박꽃나무가 있고, 여기다가는 더덕을 심었는디 더덕이 썩어서 읍써지면 그때는 으른들이 더덕이 동자 돼서 도망갔다고 했어. 여긴 오야나무, 지끔은 자두라고 하지? 여긴 감나무... 하여튼 내가 잊어버려서 그렇지 나무들이 더 많았어. 여긴 불두화, 저기 저 백일홍나문가? 배롱나무, 그 전엔 간지럼나무라고 했어. 어! 토방을 안 그렸네. 여긴 댓돌..."
"엄마, 이 집이 어디에 있었어?"
"운산면 용연리 1구... 지금은 동네가 다 읍써졌지."
"여기서 살 때가 엄마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어?"
"그랬지. 좋았지.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는 노래 가르쳐주고 엄마는 유희 가르쳐주고... "
"엄마, 거기 가볼까? 멀지 않잖아. 오늘 날씨도 좋고."
"그래 가보자. 가서 엄마 울면 어떡할래? 엄마 아빠 생각하고 울면..."
엄마의 눈시울이 벌써 살짝 붉어졌다. 여든 줄의 늙은 엄마가 어린아이처럼 '엄마, 아빠'를 찾으며 운다면.
"같이 울지 뭐... 가자, 엄마!"
나는 캠코더를 챙겨들었다. 그렇게 노부모와 특별한 나들이를 나서게 됐다. 날씨 화창한 초가을 어느 날. 그때까지 나는 엄마의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 몰랐다. 지척에 있었음에도.
아버지가 (1934년생, 만85세) 운전대를 극구 잡았다. 아무래도 위험한 동행이다. '운전 그만 할 때다'하면, 아버지는 진정 모욕당한 사람처럼 인상을 쓰신다. 그래, 마지막으로 타드리자.
당진 시내를 빠져나가 647번 지방도로를 탔다. 차창 우측으론 황금빛 평야가 스쳐갔다. 좌측으론 상왕산과 일락산이 가야산으로 이어지며, 초지 능선이 굽이굽이 뻗어갔다. 평화롭게 풀을 뜯는 누런 소떼들도 지나갔다. 이국적인 목장의 풍광과 마을을 지나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가는 내내 차안에서 옛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고향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적하다 하시지만, 딸이 어느 때보다도 얘기를 잘 들어주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지식인이었고 진실하고 곧고, 하여튼 내가 아버지를 생각하면 참 좋으신 분이셨어. 우리들 키울 적에도 한번 이년 저년 소리를 안 하셨어. 잘못하면 사매로 안 때리고 네가 이거 이거 잘못했고... 그래서 나도 니들 그렇게 키웠잖니..."
엄마가 15살 때까지 살았다는 산골 고향마을. 도착해보니 50여 가구가 살았다는 엄마의 고향은 수몰지였다. 저수지로 향해 언덕길을 내려가며 아버지가 물었다. 엄마 손을 꼭 잡고 휘청휘청 노인 걸음을 떼며.
"저 아래에 동네가 있는 겨?"
"동네는 읎지. 저수지 됐잖어."
엄마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듣지 못했다.
"저 물 위에서 살았다는 얘기여?"
내가 목청껏 소리 지르며 끼어들었다.
"아니, 물에 잠겼다고!"
아버지는 귀가 많이 깜깜해지셨다. 의사소통이 불편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보청기 착용은커녕 청력 검사조차 손사래를 치신다. '노인네처럼 무슨 보청기는...' 라며. 당신 마음은 '만년청년'이시다. 인생의 막바지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걸까. 그 시기엔 몸과 정신이 모래섬마냥, 산들바람만 스쳐도 사르르 무너져 내린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나,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나. 고집이 보통 아니시다.
"그거 고지 안 들린다! 집 한 채도 읍써 지금?"
아버지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물었다. 농담을 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곧바로 걱정 섞인 엄마의 타박이 이어졌다.
"읎지. 아이구~ 우리 할아버지, 그런 것도 이해 못 허고 어떡헌댜?"
나는 두 분을 향해 들고 있던 캠코더 렌즈를 아래쪽으로 휙 돌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부모의 모습이 프레임 안에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진달래, 산벚꽃, 자작나무 같은 교목과 잡목들로 에워싸인 저수지가 들어왔다. 한 계절 끝에서 푸른 기운을 떨치고 있는 나뭇잎들과 저수지의 수면이 뿌옇게 흔들렸다. 제대로 초점이 잡히지 않는 피사체들. 마치 먼 과거의 아련한 기억들처럼. 아직 조작법이 서툰 '디지털 4K 비디오 캠코더'. 아버지가 지난봄에 내게 넘겨준 고가의 기기다.
저수지 주변을 서성이면서 엄마는 옛날이야기들을 계속 쏟아놓았다.
" ... 산으로 버찌 따러 다니고 밤에는 광솔 불 켜 갔고서 내로 고기 잡으러 다니고... 여기, 여기에 가재가 깔렸었는데..."
엄마는 늑대와 여우가 마을을 어슬렁대던 그 시절의 흔적들을 찾고 싶어 했다.
"저기, 추석 때면 올라가 놀았는데 바위가 안 보이네... 저기, 저기가 집 있던 자린디... 거기서 운산 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마을(저수지)은 사방 야트막한 구릉과 숲으로 폭 에워싸여 있었다. 세상 아늑하고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전쟁 때도 큰 변고를 치르지 않았다는 마을. 50여 가구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중중 땋은 머리에 댕기를 매고 무명한복을 입고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는 엄마 모습도 환영처럼...
"엄마, 여기서 살던 때 일들을 다 기억해?"
"옛날 거는 다 생각나지. 아주 생생하지. 눈에 선해. 지금 거가 왔다갔다 하지. 지금 일들이 깜박깜박 하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목장 언덕길을 올라가며 엄마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 살던 고향은~ 꽃피는 ~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그 특별한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지리산 집으로 돌아와 그날 찍은 영상을 편집했다. 영상을 보며 왠지 가슴이 미어져내려 자꾸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