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악 장군 교지이광악 장군 교지.
오홍지 기자
왜군의 선봉이 진주성의 동쪽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이 다치자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
이때 돌진해 온 적장을 이광악 장군이 화살로 쏘아 죽였다. 그러자 전의를 잃은 적군은 물러나기 시작했고, 조선군은 사기가 충전돼 퇴각하는 적을 물리쳐 크게 승리했다는 설은 유명하다.
정유재란 때에는 남원전투에서 순국한 이복남(李福男)을 대신해 전라병사에 임명돼 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 결과, 순천·광양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이어 순천 예교성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의 선봉군으로 활약했다.
이광악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에 빛나는 진주성전투 승리의 주역으로서, 그 공을 인정받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됐다.
이후 수원(水原)부사·경기방어사·영흥(永興)부사를 거쳐 1606년(선조 39)에는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2년 후 1608년. 이광악 장군은 향년 52세 나이로 세상과 이별했다. 그 후 1711년(숙종 37)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이광악 장군의 묘소는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탑말에 있다. 이곳에는 조부 이연경, 아버지 이호약의 무덤과 함께 있는데, 무덤 아래쪽 사당인 `문효사(文孝祠)'에 장군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이광악의 선무공신교서는 원래는 불정면 삼방리의 후손가에 전해져 오다가, 장군이 쓰던 보검과 얼굴이 그려진 영정 등과 함께 1987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돼 관리하고 있다.
보물 952호인 이 문서에는 이광악 장군의 자질과 품성, 경력, 진주성을 방어하는데 세운 무공과 공신에게 내리는 혜택 등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광악 장군이 이달의 호국 인물의 선정되면서 후손들의 현양 행사도 최근 진행됐다. 이광악 장군의 16세손인 이광희 씨가 헌화와 분향을 한 데 이어, 이날 방문한 육군참모총장을 대리해 육군제 1방공여단 이경주 장군이 헌화와 분향을 하기도 했다.
이어서 보훈처장 대리와 서울지방보훈청 이재진 보훈과장의 헌화와 분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