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잠긴 나경원 의원 사무실 앞에 서있는 공무원노조 해고노동자들
연정
"그날 우리가 만났다면 살아있을까?"
"나는 장례식장에 갔어도 실감이 안 났어요. 안 믿겼던 거죠."
나경원 의원 사무실 앞에서 만난 이창화씨는 고(故) 전대곤씨의 죽음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씨는 고령군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2004년 공무원노조 파업으로 해고를 당해 전씨와 함께 대구경북 지역에서 노동조합 활동과 회복투 활동을 해왔다. 이씨는 전씨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회복투 성원 중 한 명이다.
"해직 상태가 고립되다 보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이 올 수 있어서 수시로 현직자나 가까운 사람들끼리 만나 밥도 먹고 술이나 차도 마셔요. 10월 1일 날 만났을 때 아무 낌새도 없었어요. 그때 (고인이) 조국 전 장관 이야기하고 검찰개혁 이야기하고 열변을 토하고 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줄 전혀 몰랐죠. 그러다가 느닷없이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실감이 안 나죠."
이 일을 생각하면 이창화씨는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든다. 10월 10일에 대구경북 지역 해고노동자들과 현직자들이 함께 모여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계획이 보류되면서 전씨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0월 10일 세종시에서 갑자기 회복투 집회 일정이 잡혀 갔다 왔어요. 그러면서 그 모임이 보류된 거죠.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인 10월 14일에 서울 농성장으로 올라왔어요. 우리가 다 빠져버리면서 그 계획(모임)이 진행이 안 됐어요."
이창화씨는 서울 농성장에 와있을 때 고 전대곤씨에게 카톡을 받았다고 했다. "밥 잘 먹고 감기 조심하고 건강 잘 챙기라"는 평소와 다름없는 안부와 격려가 담긴 내용이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왔다가 주말 농성조를 남겨두고 절반의 대구경북 해고노동자들이 내려온 다음 날 전씨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들이 내려오던 10월 14일에 고 전대곤씨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해고노동자들은 전씨가 해고를 당한 이후 우울증약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때서야 알게 된다.
"우리가 가깝게 있었으면 그때 답답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면 되는데... 늘 그런 상태(힘든 상태)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했으면 무사히 넘길 수도 있지 않았겠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집에 오면 그 생각이 자꾸 나는 거예요. 세월 가면 무뎌지겠지..."
이창화씨는 그날 이후 계속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우리가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안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씨 뿐만 아니라 많은 해고노동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부가 한 부당징계, 정부가 잘못 인정하고 결심해야
"차라리 퇴직 이런 거 없이 사람들(해고자들)이 계속 모여서 움직였다면 갈 때까지는 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게 아쉽고."
이창화씨는 고 전대곤씨가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고 전대곤씨는 남구청 인사계에 근무하다 2004년 공무원노조 파업 투쟁으로 해고를 당했다. 당시 전씨는 공무원노조 대구경북본부 수석 부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 뒤에도 대구경북지역 회복투 위원장, 공무원노조 4기 교육국장과 총무국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정년을 맞이하기 직전인 2017년 말까지 대구 김부겸 의원 사무실 앞에서 농성하는 등 복직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해직되기 전에 인사 주무 담당자였어요. 그런 자리는 통상 바로 진급하는 자리에요. 상식이 풍부하고. 업무적인 능력도 대단했던 사람이에요. 그때 노동조합 안 했으면 바로 진급해서 승승장구했을 사람인데 이쪽으로 와서... 더 안타깝죠."
이창화씨는 고 전대곤씨가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하는 등 복직 투쟁을 위해 건강관리도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감정이 좀 모라 카나. 순박하다 해야 하나. 감정이 정말 풍부했어요. 세월호 때 집회를 저랑 같이 갔다 왔어요. 그날 세월호 아이들 영상이 공개 돼서 그거를 보는데 이 사람이 막 통곡을 하는 거예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통곡했어요. 물을 떠다 주니 물 마시고 한참 뒤에 진정되고 그랬어요."
이씨는 전씨가 선거운동 때문에 대구에 내려왔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크게 호통을 쳤던 해고노동자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도 들려준다. 이씨는 고인이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했다.
"해고자 복직 문제는 정부가 결심하면 할 수 있는 부분인데 안 하고 있다고 했어요. 정부가 추진한 부당징계 때문에 우리가 해직된 건데. 정부가 결정하고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면 해결되는 거잖아요. (고인은) 정치권이 계속 핑계만 대는 게 비겁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이창화씨는 고인이 현직들(현재 근무 중인 공무원들)이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분리되는 정서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해고노동자들의 우울증, 관계의 어려움 호소
지난 2016년 공무원노조에서 공무원 해고노동자들의 우울증과 관련된 자체 설문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 비율이 약 53%로 상당히 높게 나왔다. 이 비율은 연령이 증가할수록 증가한다. 51세 이상에서 절반이, 56세 이상에서는 63%까지 높게 나타났다. 노후생활에 대한 불안과 복직을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좌절과 절망이 그 이유일 것이다.
김은환 위원장은 해고노동자들이 정년이 되면 그나마 노조에서 받던 생계비가 끊기는 상황에서 대부분이 연금 수급 자격도 안 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관계의 어려움도 만만치 않다.
"직장에서 퇴직만해도 관계가 멀어지는데 이거는 더하죠. 동료가 없잖아요. 십여 년 동안 해고자로 살았으니 친구 관계도 소원해지고. 어떤 가족들이 이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겠어요? 자기 혼자 남는 거죠. 연금은 고사하고 사람도 없지 돈도 없지 아무것도 없단 말이에요. '내가 괜히 했나?' 사람들이 힘들죠."
공무원 해고노동자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힘들지 않냐고 물었는데 "너무 많이 힘들다"거나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또는 "나는 괜찮은데 다른 동지들이 힘든 거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김은환 위원장은 본인도 그렇고 해고노동자 대부분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다.
그 벽이 무너졌던 순간이 한 번 있었다고 했다. 지난해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집단 심리 상담을 진행했을 때였다. 일인시위를 하고 있던 양성윤씨가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양씨는 양천구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2010년 공무원노조 위원장에 당선된 지 4일 만에 해고를 당했다. 토요일에 공무원노조와 전교조가 주최하는 노조탄압 규탄대회를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된 야4당이 하는 집회에 앉아있었다는 것이 해고 사유였다.
"나의 과거-현재-미래에 관해 쓰라고 했는데 그거 할 때까지도 웃고 했던 사람들이 발표가 시작되고 다 울었어요. 첫 번째 발표한 사람이 울고, 그다음 발표한 사람도 울고..."
해고노동자들이 과거의 자신을 생각할 때는 가족과 공무원을 하게 된 이유, 잘못된 공무원 사회 관행을 바꾸기 위한 노조 설립 등이 있었다. 노동조합 깃발만 꽂으면 80~90% 정도가 조합원 가입을 할 만큼 큰 지지를 받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복직은 호소하거나 부탁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