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때 출범이 물건너 간데다, 자유한국당이 추천 위원 수 확대를 주장하면서 진상규명의 실질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사진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의 모습이 담긴 5·18미공개 영상의 한 장면.
광주드림
공수부대 특공조는 도청으로 오는 시민들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시민이 있는 건물에는 수류탄을 마구 터뜨렸다. 유대인 학살에 동원된 나치군대와 다르지 않은, 야만의 극치였다. 나치 병사들이 유대인들을 고문하면서 바그너의 가곡을 들었다고 한다.
무수한 시민군들이 공수대원들과의 사격 대치중에 죽어갔다. 곧 총알이 떨어진 시민군들은 투항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항복할 마음을 먹었다. 시청 정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시민군 1명이 공수대원의 사격에 의해 즉사당한 바로 그때 8명의 시민군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무장을 해제한 채 도청 앞 뜰로 걸어나왔으나, 달아나던 시민군을 살해했던 계엄군은 8명의 투항자들을 전원 사살하였다. 한 계엄군 병사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주석 23)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은 "1인당 40여 발의 실탄을 사용했다. 발포하지 않은 계엄군을 감안하면 1인당 50여 발 이상 발포했고, 공수부대는 100여 발 이상의 실탄을 사용한 셈이다. 이는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집단 발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주석 24)
5ㆍ18항쟁기 계엄군의 실탄 사용내역을 보면, 소화기 497,962발, 권총 2,754발, 기관총 10,759발, 수류탄 194발, 40M탄 60발, 90M 무반동총 8발, 기타(신호탄 등) 889발, 통계 512,626발이었다. 소화기 실탄 및 수류탄의 80%는 특전사에서 사용하고, 무반동총은 아군(계엄군)간 오인 교전 시 사용되었다. (주석 25)
주석
22> 윤재걸, 앞의 책, 137쪽.
23>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강준만, 앞의 책, 156쪽.
24> 노영기, 앞의 책, 266쪽.
25> 앞의 책, 266~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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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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