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을 재촬영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동학군이 패퇴하면서 집강소도 막을 내렸다. 짧은 기간이어서 집강소가 근대적 정부수립이나 자치의 기능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적지않다.
세계사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자치는 프랑스혁명 후에 나타난 파리꼬뮨이 꼽힌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는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할아버지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다. 얼마 뒤 프로이센과 전쟁을 일으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파리 시민들은 루이황제를 폐위시키고 제3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국민방위군을 결성, 프로이센군대와 맞섰으나 막강한 정규군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구성했는데 60% 의석을 차지한 왕당파 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굴욕적인 조약체결에 앞장서고 왕정복고를 획책했다. 공화파는 20%의 소수 의석이지만 파리선거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왕당파의 음모에 맞섰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파리시민들이 다시 궐기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로 파리꼬뮨(Paris Commune)이 구성되었다.
파리꼬뮨은 자치관제와 자체방위군을 유지하면서 자치활동을 진행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군이 파리시내로 진입하자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일주일 동안 잔인한 학살극이 자행되어 2만여 명이 사망했다. 파리꼬뮨이 구성되는 날 『인민의 외침)』은 <축제(La féte)>라는 표제의 논설을 실었다.
꼬뮨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에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의 사람들을 우러러본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며, 제정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 준다.……
꼬뮨이 선언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내일은, 시민병 제군, 어제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꼼뮨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詩)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되다. (주석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