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6일 김재철 전 MBC사장이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뒤로는 '김재철 구속'이라고 쓴 팻말을 든 MBC 노조원 등이 보인다.
이희훈
그런데 김재철 사장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 MBC 지배구조 때문에, 김재철만큼은 아닐지라도 문제적인 사장들이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었다.
MBC는 기업인 김지태가 1961년에 세운 한국문화방송에서 출발했다. 김지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부일장학회 장학금을 줬던 인물이다.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에 "그분이 내 인생에 디딤돌을 놓아준 은인이었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지난 3월 15일 자유한국당 의원총회 때 곽상도 의원이 김지태를 친일파인 듯 몰아붙였지만, 김지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말단 직원으로 5년간 근무한 적은 있어도 <친일인명사전>이 말하는 친일파는 아니었다.
김지태는 MBC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주역인 박정희 장군이 그의 재산을 빼앗고 한국문화방송 주식도 강탈했기 때문이다. 이때 부일장학회도 박정희 쪽으로 넘어가 5·16장학회가 되고 정수장학회가 됐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MBC는 5·16장학회의 지배를 받았다. 자연히 박정희 손아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1969년경 경영난에 봉착하자 박 정권이 주식 70%를 현대·쌍용화재 등 11개 대기업에 넘겼지만, 의결권 없는 주식을 준 것이기에 MBC는 계속해서 박 정권 손아귀에 남아 있었다.
1980년에 전두환의 신군부가 청와대를 장악하자, 그 11개 대기업들은 MBC 주식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것은 KBS로 돌아갔다. MBC에 대한 정권의 지배가 KBS를 경유해 계속 이뤄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배구조 때문에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MBC
1987년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12월 31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라는 공익재단이 설립됐다. KBS가 갖고 있던 MBC 지분 70%가 바로 이 방문진에 넘어갔다. 하지만, MBC에 대한 정권의 영향력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정권이 방문진을 통해 MBC를 움직일 수 있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통로가 바로 방송문화진흥회법(방문진법)이다.
1988년 12월 26일 제정되고 당일부터 시행된 최초의 방문진법 제6조 제3항은 국회의장이 추천하는 4인과 방송위원회(지금의 방송통신위원회)가 추천하는 4인을 방송위원회 위원장이 방문진 이사로 임명하도록 했다.
1987년 제정된 방송법 제12조에서는 방송위원회 위원 12명을 대통령이 임명하되 4명은 국회의장이, 4명은 대법원장이 추천하도록 했다. 국회의장과 대법원장이 추천권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방송위원 12명 전원에 대한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었다. 이 12명 중 한 명이 방송위원장이 됐다. 방송위원장과 방송위원이 대통령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방문진법에서는 방문진 이사 8명을 방송위원장이 임명하되 그중 4명은 국회의장이 추천하도록 했다. 방송위원장과 방송위원들이 대통령 영향 아래 있었으니, 방송위원장에 의해 구성되는 방문진 이사진 역시 친정권 성향을 띨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방문진이 1988년 12월 31일부터 MBC를 지배했으니, MBC가 권력의 수중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동안 MBC 뉴스가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그 같은 지배구조 때문에 MBC는 항상 정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등장한 지배구조는 현재도 별다른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다. 2014년에 개정된 현행 방문진법 제6조는 "이사는 방송에 관한 전문성 및 사회 각 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하여 방송통신위원회가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한편, 2018년에 개정된 현행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방송통신위원회법) 제5조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위원장 및 위원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이 두 규정은 청와대가 방통위와 방문진을 통해 MBC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MBC의 공공성을 해할 수 있는 요소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김중배, 청와대의 영향력을 거부한 MBC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