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총장’이란 표현을 쓰는 일본 검찰. 검찰청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현재의 검사총장인 이나다 노부오.
일본 검찰청
이 갈등에는 역사적인 기원이 있다. 이것은 1945년 패망 이전의 일본에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것이 식민지 한국을 거쳐 현대 한국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검찰총장을 검사총장이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이 명칭이 쓰였던 것은 아니다. 대검사·검사장·칙임검사 같은 명칭으로 불리다가 1880년부터 검사총장으로 불렸다.
검사총장은 처음에는 상징적 존재였다. 그래서 법무부 장관에 상응하는 사법대신이 일선 검사장들을 직접 지휘·감독했다. 검사총장이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법대신이 이렇게 한다 해도 둘 사이에 마찰이 생길 일이 없었다.
참고로, 일본의 법무부 장관은 1869년부터는 형부경(刑部卿), 1871년부터는 사법경, 1885년부터는 사법대신, 1948년부터는 법무총재로 불렸다가, 1952년부터 현재까지 법무대신으로 불리고 있다.
그처럼 상징적 존재였던 검사총장이 실권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1900년대와 1910년대 발생한 일련의 정경유착 사건들이 원동력이 됐다. 내각의 명운에 영향을 줄 만한 사건들이 많아지면서, 검사총장이 내각 일원인 사법대신을 제치고 직접 수사팀을 꾸려 검사들을 지휘·감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문준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논문 '한국적 검찰제도의 형성'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00~1910년대에 일련의 정경유착 사건에서 검사총장이 검찰 수사진을 직접 조직하여 수사를 지휘하고, 때로는 검찰수사 결과에 따라 내각이 붕괴하거나 혹은 검찰과 내각이 정치적 거래를 하게 되는 등 검찰권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검사총장은 명실상부한 검찰의 수장이 되었다."
- 내일을여는역사재단이 2009년 발행한 <내일을 여는 역사> 제36호.
이처럼 검사총장의 위상이 달라지면서 1920년대 후반부터 사법대신과의 갈등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일선 검사들에 대한 지휘권을 놓고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에게 도전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이는 '검사총장을 거치지 않으면 사법대신이 검사들을 지휘·감독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입법 논의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일본 검찰 제도의 영향을 받은 현행 대한민국 검찰청법 제8조는 "법무부 장관은 검찰 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일반적으로 검사를 지휘·감독하고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한다"고 규정한다. 구체적 사건과 관련해서는 법무부 장관이 일선 검사에게 직접 지시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규정이 생겨난 기원이 바로 1920년대 후반의 일본이다. 이 같은 법적 장치는 일본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에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됐다.
검사총장이 사법대신을 견제한 것은 출신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사법대신의 지휘·감독권이 강해지면 사법대신을 매개로 내각의 입김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검찰을 강화할 목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지나치게 막강해진 검찰 권력을 개혁하려는 노력이 1945년 패망 이후의 일본에서 나타났다. 이른바 '검찰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검찰의 힘을 빼려는 노력이었다. 패전 이전에 나타난 전전(戰前) 검찰의 적폐를 청산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점령국인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패망 이전의 지배층이 그대로 온존됐으니 개혁이 철저히 이루어질 리 없었다.
가와사키 히데아키 간세이가쿠인대학 교수는 2006년에 한국 학술지 <공익과 인권> 제3권 제2호에 기고한 '일본 검찰제도의 문제 상황과 개혁 과제'라는 논문에서 "검찰 민주화 이념이 배제하려고 한 전전(戰前) 검찰의 실태, 특히 권력 영합성 그리고 노동·민중 운동에 대한 적대성이 형태를 바꾸면서도 여전히 불식되지 않았다"면서 "검찰 민주화는 현대적 과제"라고 탄식했다. 패망 직후부터 추진된 검찰개혁이 여태까지 '현대적 과제'로 남아 있으니, 이 개혁을 성사시키려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드는지 절감케 된다.
식민지 한국에는 총독부만 있었을 뿐 내각이 없었으므로, 사법대신과 검사총장의 갈등이 벌어질 리 없었다. 하지만, 검사들이 총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사법대신과 맞서는 검찰문화가 식민지 한국에도 이식됐고, 이것은 미군정기와 1948년 정부 수립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은 이처럼 패망 이전의 일본에서 싹튼 현상이다.
문민정부 들어선 후, '검찰권력'이 강해진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