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옥수동 사무실에서 만난 구수정 이사.바쁜 와중에도 얼굴이 밝아 보인다.
김진영
되돌릴 수 없는 상처는 기억해야 한다
- 2년 전 연꽃아래와 인터뷰 이후 시민평화법정이 진행되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무엇인가요?
"원고석에 앉은 두 탄 아주머니의 최후 발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퐁니 마을의 탄아주머니는 '피해자들을 기억해 달라'라고, 하미 마을의 탄아주머니는 '하미 마을에 갇혀있는 비문을 이제는 열어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발언이 기억이 남고,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단지 50년 전의 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역사라고 준엄하게 얘기하는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피해자들이 입은 상처는 복구하거나 복원할 수 없는 상처라 생각해요. 배상을 한다거나 사과를 한다고 해도 죽은 사람들이 살아올 수 없는 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이라 생각해요."
- 전시회 이름이 '확인 중…'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것이 1999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확인해준 적이 없어요. 아직도 우리에게 베트남 학살은 의혹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확인 중'의 문제인 것이죠. 그렇지만, 어떠한 문제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없었던 문제라 말하기는 어렵지요."
이번 아카이빙 기록전 '확인 중…'은 그녀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우리는 그들의 상처와 역사를 보상할 수 없다. 베트남은 복구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상처를 역사에 남겨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새겨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이 한국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말했다.
썩지 못한 주민등록증, 그리움이 어린 빛바랜 그림
'확인 중…'에서는 20년간 베트남 민간인 학살 조사 과정에서 모은 다양한 증거물들이 공개된다. 그중에는 "한국 측에 나와 있는 자료를 모두 확인해봤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는 국방부 답변에 완전히 반대되는 베트남 정부의 보고서도 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정부 차원에서 한국군의 학살에 대해 공식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 공식 자료들, 보고서 형태의 자료들이 아무에게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이번 전시회에서 공을 들여서 수집한 것은 피해자들의 유품이었다. 구수정 이사는 "피해자들 수십 명에게 연락해야 하나의 수집물이 나올까 말까 했기에 매우 어려운 과정이었다"라고 말했다.
"유족들 입장에서는 유일한 유품이었으니까요. 유가족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유가족들은 한국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알리고 싶었기에, 그들에게 남겨진 것들을 그녀에게 내주었다.
- 무덤 이장 과정에서 발견된 증거들도 있다고요.
"학살 당시에는 한국군이 지키고 있어서, 유가족들은 피해자들의 장례를 치르기보다 가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땅을 깊게 팔 시간도 없이 대충 파서, 거적데기에 둘둘 말거나 옷 입은 모습 그대로 집단 가매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학살이 끝나고 30년 정도가 흘러서야 가매장한 무덤을 다시 무덤으로 이장할 수 있었지요.
학살 이후 3~40년 이후 가매장한 무덤을 다시 파냈을 때 유골은 이미 다 썩어서 뼈 몇 덩이만 남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이 유골 위에 놓여있는 경우도 있었지요. 뼈와 살이 다 사라진 후에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어놨던 주민등록증만 남은 거죠.
어떤 분은 가족 여섯 명이 있던 가매장된 무덤을 이장하려고 파보니, 한국군의 탄알이 5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유족분이 그 탄알을 한국군 학살의 증거로 보관해 오셨던 거예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 증거가 이 학살의 증거를 밝히는 데 도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해주면서 내어주셨죠.
- 특별히 마음 아픈 수집물이 있다면요.
"응 우옌 니엠이라는 할아버지가 빈호아 학살에서 아내를 잃으셨는데, 매우 사랑하셨나봐요. 이 할아버지가 잡기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안에 당시에 쓴 시와 그림, 글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했는지 나와 있어요. 할아버지는 부인의 죽음 이후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하셨어요.
당신의 부인의 죽음이 안타깝고, 다시 볼 수 없어서 너무나 그리웠던 할아버지가 재단을 만들었는데, 재단에 올릴 부인의 사진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할아버지가 직접 초상화를 그렸어요. 초상화에서는 한자로 맨 위에 현처라고 쓰여 있어요. 어진 아내. 초상화를 직접 할아버지가 그리시고, 맨 마지막에는 남조선 학살 병오년 몇 월 며칠이라고 쓰여 있어요.
그 위에 현처라고 쓰신 마음과 맨 마지막에 남조선 학살이라고 쓴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사진 한 장 없어서 직접 그려서 올려놓은 마음이 어떨까, 할아버지는 매일 이 재단에 기도를 하며 어떤 기도를 했을까... 그 일기장과 그림. 할아버지의 비통함, 그 슬픔이 너무 잘 느껴지는 유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