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유허비
이민선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지도자이다. 연해주에서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 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이상설 열사 유허비(遺墟碑) 내용 중 일부다. 이상설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박탈당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투쟁을 벌였다. 그 뒤 만주로 망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파견되어 독립을 호소했다.
그 후 계속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병사했다. 죽기 전에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했고, 유해는 고려인들이 슬픈강이라 부르는 수이푼강에 뿌렸다.
고단했던 그의 삶을 알려주는 듯 유허비 주변은 황량하기만 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벌판에 덩그러니 세워진 유허비. 그의 유해가 뿌려진 수이푼 강은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잔물결을 일으키며 무심하게 흘렀다. 유허비 곁을 지키는 것은 한국에서 공수한 것으로 알려진 소나무 몇 그루뿐이었다.
하지만 이 유허비마저 없었다면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치열하고 고결한 삶을 들여다 볼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차디찬 비석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 일행이 묵념을 할 즈음 한 무리의 사람이 버스에서 내렸다. 한국말을 썼다. 서울에 있는 한 고등학교 수학여행단이었다.
수학여행단이 우리 일행과 바통 터치하듯 유허비 주변으로 모이는 것을 보며 주변이 참 황량하다는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떨칠 수 있었다. 이상설의 한과 결기가 유허비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역사원정대는 나에게 안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