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5.18 기록관
해방 후 한국 언론사에서 광주항쟁 10일 동안과 그 이후는 가장 낯부끄러운 시기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 광주KBS와 광주MBC가 시민들에 의해 불타고, 지역과 전국의 언론(인)이 저주와 불신을 받게 되었다. 전두환 일당의 언론통제 조처와 계엄령이라는 비상사태라고 핑계 삼을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백주에 다수의 국민이 계엄군과 경찰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외신들이 특파원을 광주에 파견하여 신속히 보도했다.
외지(外紙)들은 계엄사 검열로 대부분 가위질이나 먹칠을 당했지만, 그런 속에서도 독자들은 전후 문맥을 통해 내용을 헤아릴 수 있었다.
국내 신문은 5월 21일에야 처음으로 "지난 18일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는 뜬구름 잡는 식의, 계엄사가 발표한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 대신 김대중에 대한 중간조사 결과라고 해서 "학원사태의 치밀한 배후 조종자"라고 보도했다.
학원사태와 광주사태의 책임을 김대중에게 되집어 씌운 것이다. 이같은 발표는 광주시민들의 분기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시민들은 시위에서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더욱 거세게 외쳤다.
『뉴욕타임스』 서울주재 기자로 5ㆍ18 현장을 취재했던 심재훈의 기록이다. 그가 어렵게 광주에 도착했을 때 한 시민이 그를 소개해주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여기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가 광주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드디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자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변의 군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는 마치 개선장군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들에게 우리가 구세주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주는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여자ㆍ노약자ㆍ어린이 가리지 않고 김밥과 각종 과일 등 음식물을 차에다 올려주거나 양동이로 물을 길러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광주시민들에게서 느낀 첫 인상은 폭동(Violence)이 아니라 봉기(Insurrection)였다. 나의 판단은 광주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들이 왜 우리를 구세주처럼 환영하는 지 이유도 알게 됐다.
그들의 봉기는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서울 등 외부세계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의 등장이야말로 외부 세계에 광주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통로였다. (주석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