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를 밝힌 조국 법무부 장관이 14일 오후 경기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를 나서고 있다.
유성호
조국 법무부장관이 임명 35일 만에 사퇴했다. 끝까지 완주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가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것은 아니다. 사퇴를 표명하는 글에서 밝힌 것처럼, 적어도 개혁의 불쏘시개 역할은 했다고 볼 수 있다. 장관 재직 중에 검찰개혁을 궤도에 올려놨으니, 그렇게 자평할 만도 하다.
물론 그가 혼자 해낸 일은 아니다. '촛불'의 재등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럴지라도 그의 기여도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만약 그가 장관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포기했다면, 검찰개혁이 훨씬 힘든 상황에 빠졌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과 가족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지는데도 꿋꿋하게 달려갔다. 그런 그의 모습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도 그의 기여도를 평가해야 한다.
10월 들어 가동되기 시작한 일련의 검찰개혁은, 이 땅에서 현대적 검찰제도가 작동한 지난 100년 동안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던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기득권 편인 검찰을 국민 편으로 끌어당기는 일대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조국 전 장관은 대한민국 역사가 기억할 만한 개혁가라고 평가한다.
또, 검찰개혁은 검찰을 개혁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검찰 배후의 수구 기득권 세력에 타격을 주는 것이 검찰개혁의 본질이라고 본다. 정치검찰을 방패 삼아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세력과의 싸움이 이 개혁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싸움으로 소수 정치검사들이 불이익을 입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 큰 불이익은 정치검찰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게 되는 수구세력한테 돌아간다고 볼 수 있다. 정치검찰을 방패 삼아 자신들의 불법을 감추고 국민 대중을 억눌러온 수구세력이 법적 방어수단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이런 류의 싸움은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많았다. 그리고 항상 격렬했다. 수구세력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개혁의 선봉에 서는 사람들은 조국 전 장관처럼 거의 다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급제하자마자 권력기관 혁신한 조광조
조선 중종 임금 때의 조광조(1482~1520)도 그랬다. 개혁적 사림파(유림파·선비세력)인 김광필한테서 수학한 그는 25세 때인 1507년, 서얼철폐 등을 추구하는 혁명적 역모에 가담했다. 개국공신의 후예라는 점과 집안이 명문가라는 점이 감안돼 훈방 조치를 받지 않았다면, 그는 참수형이나 교수형을 받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운동권 선비'의 길을 포기하고 과거시험 준비에 매진한 그는 1510년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에서 장원급제해 진사 자격을 획득한 뒤, 국립대학 성균관에 입학해 제2단계인 대과를 준비했다. 대과에 급제한 것은 34세 때인 1515년이다.
대과 급제 뒤 사간원(직언 담당 기관)에 배치된 그는 예전의 정치적 성향이 되살아나 개혁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는 권력기관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이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중종은 사헌부(검찰청)와 사간원(직언 담당)의 정9품 이상을 전원 교체하는 일대 인사혁신을 단행했다. 단, 사간원 신참 조광조만은 제외했다.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권력기관 둘을 혁신한 조광조는 중종의 전폭적 신임 하에 사상 최초로 사림파 정권을 꾸리고,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 하에 급진개혁을 단행했다. 조광조 정권에서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선비 철학자 집단이 중앙과 재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과거에 급제했든 안 했든 선비 그룹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사림파 정권, 유림파 정권, 선비들의 세상이라 할 만했다. 한국 역사에서 철학자 집단이 국정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 정권이 지향한 방향 중 하나는 수구세력인 훈구파가 차지했던 관직과 명예와 재산을 사림파 쪽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훈구파의 목줄을 죄는 쪽으로 개혁에 속도를 붙였던 것이다. 이는 훈구파의 증오와 저항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계에서만 밀려났을 뿐 여전히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던 훈구파는 조광조를 비방하는 한편, 그와 중종 사이를 갈라놓으려 애썼다. 조광조가 임금 자리를 탐한다는 소문도 퍼트렸다.
이 시도는 결국 성공했다. 안 그래도 조광조의 인기 급상승을 불편해 하던 중종은 뚜렷한 혐의도 없이 조광조와 그 일파를 제거한 뒤 훈구파와 다시 제휴했다. 1520년, 조광조 나이 38세 때 일이다. 중종의 갑작스러운 배신으로 조광조는 순식간에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훈구파는 갑자기 출현한 조광조와 그의 정권 때문에 몇 년간 멍한 상태로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다가 조광조가 갑자기 처형되자 그들은 제2의 조광조를 막고자 사림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조광조를 두고두고 깎아내렸음은 물론이다.
만약 조광조 사후 47년 뒤인 1567년에 사림파가 선조 임금 즉위와 더불어 영구 집권에 성공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조광조는 훨씬 더 오랜 세월 두고두고 욕을 먹었을 것이다.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건드린 대가를 좀 더 오랫동안 치러야 했을 것이다.
왕들이 개혁 위해 '뉴페이스' 찾아 나서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