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스나인의 AI화가 '이메진AI'와 두민 작가가 독도를 주제로 협업하여 그린 작품. 제목은 '교감하다'라는 뜻의 'Commune with...'. 채색화가 본 작품이며, 그 전에 드로잉화가 펜으로 그려졌다.
펄스나인
바야흐로 역사는 흐르고 흘러 예술과 기술, 그리고 과학이 한 몸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오고 있다.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 아트', 그 단어만 들어도 '아니 이제 예술까지?' 하고 몸서리를 치며 인간의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와이 낫(Why not)?'이라고 어깨를 으쓱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얼마 전 보았던 영국 드라마 <휴먼즈(Humans)>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냉장고나 TV를 구입하듯이 특별한 고민 없이 대형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가사노동 로봇. 그러나 드라마에서 결국 이 로봇은 침대 머리에서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나 아픈 아내를 돌봐주는 남편의 '용도'를 폐기처분하게 만든다.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한 엄마보다 24시간 365일 변함없이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로봇이, 또한 짜증 한 마디 없이, 게다가 자신의 아픈 부위를 정확하게 진단하여 돌보아주는 로봇이 훨씬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리는 가족 구성원의 반응은 그야말로 인지상정이었다.
예술인 복지를 고민하는 필자로서는 AI가 예술인을 대체하는 상황도 염려하게 된다. (아마 대다수의 예술인들이 동일한 생각을 할 터이다.) 가뜩이나 예술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해 예술 시장은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공적 자금에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작금의 한국 상황에 AI까지 나서서 예술인들의 설 자리를 넘본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하는 아우성이 벌써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러나 예술과 기술, 그리고 과학이 서로 구별 짓기를 하던 시절이나 한 태에 태동하고 있던 시절이나 이 세 가지 요소가 결코 완벽한 편가름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AI 아트'는 예술인 혹은 인류를 침공하기 위해 지구에 착륙한 외계인으로 마냥 밀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한 AI아트 작가의 말에 따르면, AI는 "미술사에서의 사진기의 등장"과도 같다. 사물을 똑같이 찍어 현상할 수 있는 사진기가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그리는 그림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라 염려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사진과 그림의 영역이 엄연히 별개로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AI는 보다 정교화된 미술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기술적 진보와 차별화되는 AI의 '딥 러닝(Deep Learning: 심층 학습)' 능력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자극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