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29일 치 <한겨레>에 실린 문학진 기자의 기사. 기사의 맨 마지막 문장은 "실정법이라는 이름의 악법이 여 판사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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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화제가 된 여상규의 발언은 9월 28일에 나왔다. 훗날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이 되는 조성우 평화연구소장에 대한 국가보안법 및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사건 결심공판에서 여상규는 법관으로서는 꽤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
"피고인의 행위가 실정법을 위반한 점은 인정되지만, 애매한 부분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 의견으로는 군사기밀보호법은 법 규정이 매우 모호하고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등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 1989년 9월 29일 치 <한겨레>
여상규는 피고인에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하면서도, 판단의 근거법인 군사기밀보호법이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군사기밀보호법 개정을 요구하는 당시 여론에 일정 정도 편승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전두환 후계자인 노태우가 대통령인 상황에서 판사가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가 남긴 한마디가 있다.
"피고인의 목적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절차적 정의를 간과하면 그것은 오류로 판정받을 수밖에 없다."
'조성우 당신한테는 통일운동의 가치가 정의로울 수 있지만, 현행 실정법에 어긋나므로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 한편으로는 당신이 이해된다는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민청련 사건 구속자 김근태를 가혹하게 괴롭힌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1988년에 보도한 바 있고, 훗날 경기도 하남시에서 제17대 국회의원이 되는 문학진 <한겨레> 기자는 조성우 사건을 보도하면서 "실정법이라는 이름의 악법이 여 판사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라고 기사 말미에 적어놨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여상규를 '진보적 판사'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3년(45세)에 제2대 <조선일보> 회장 방일영의 이름을 딴 방일영 문화재단 이사가 된 사실은 그가 조선일보식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초가 된다. 그러면서도 6월항쟁 이후의 시국 사건에 대해 비교적 부드러운 자세를 견지했던 것이다.
두 키워드 : '청렴'과 '효자'
여상규는 다른 일로도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청렴한 판사'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93년 1월 29일 치 <한겨레>의 '평소 청렴 평판 유망 법관들 경제 사정으로 변호사 개업'이란 기사를 살펴보자.
"새 정부 출범에 때맞춰 단행되는 2월 말의 법원 정기인사에 법조계 주변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평소 청렴하다는 평판을 들어온 유망 법관들이 경제적 사정 때문에 변호사로 개업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29일 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날 현재까지 사표를 제출하거나 사의를 표명한 법관은 서울고등법원의 서정우 부장판사, 여상규·김희근 고등판사, 부산고등법원과 광주고등법원의 이문재·김완기 부장판사 등 모두 5명이다."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만 근무했고, 또 승진에 문제가 없는데도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여상규의 행동은 주목을 끌었다. 언론에 보도된 그의 경제사정은 '어머니 병환'이었다. 매월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병원비를 판사 월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변호사 개업을 택했다는 것. 가슴 짠한 사정으로 법복을 벗었던 것이다. 훗날 여상규가 초선 국회의원이 됐을 때 <국회보>는 이 일을 배경으로 '효자판사'라는 네이밍을 붙이기도 했다.
최근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부정적 측면의 보도들과는 결이 다르다. 정의를 위해 앞장선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그에게서는 '양심적 보수'의 면모도 찾을 수 있었다.
금배지 이후 달라진 삶
그렇다면, 그는 왜 최근 몇 년 사이 구설수에 자주 오르고 욕을 많이 먹게 된 걸까. 그는 1980년부터 현재까지 39년간 공적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다.
공적활동의 장으로 나온 뒤, 그는 세 차례의 대격변을 겪었다. 1980년, 박정희의 구군부에 뒤이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면서 군부독재를 연장하는 기로에서 판사가 된 것.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사법부 독립성이 강화되는 가운데 판사 생활을 계속한 것. 변호사 개업 후 그리고 2016년부터 몰락한 보수세력의 일원으로 의정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것.
'1980년 이후' 및 '1987년 이후' 두 시기에 그는 '힘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1980년에 석달윤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것은 그가 군사정권의 이해관계를 거스르지 않는 판사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그는 '유능한 판사'라는 평을 들으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1987년 이후의 시국사건에서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기는 발언을 한 것은 민주화 이후 실정법과 시대정신 두 가지 기류를 절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중의 힘이 강해지는 가운데서도 정권은 여전히 보수정당에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2016년 촛불혁명 이후로는 뭔가 '삐걱'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듯하다. 판단을 그르쳐 오점을 남기는 일도 있었다. 2017년 1월엔 박근혜 탄핵을 찬성하며 바른정당에 들어갔다가 5개월 만에 도로 나왔다. 또 말실수나 욕설로 스스로 평판을 깎아먹고 있다.
여상규 의원은 자신의 39년 법조인 인생이 최근 어떤 흐름을 타고 있는지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사법개혁이 이슈인 정국에서 국회법사위원장은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다. 우선 '막말'부터 단속하는 게 급선무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