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일제 경제 수탈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틀.
전강수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보통의 역사 연구자라면, 사료를 검토한 결과 '대가 없이 빼앗는 수탈'(그림의 (A))의 증거가 보이지 않을 경우, 바로 제국주의의 경제 수탈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병탄한 이상 뭔가 다른 방법으로 식민지를 지배하고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그 경로를 탐구하기 마련이다. 이런 태도로 접근하면 그림의 (B), 즉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 농업사 연구는 대부분 여기에 초점을 맞추었고 상당한 성과를 축적했다.
일제 강점기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연구성과가 이런 성격임에도, <반일 종족주의>는 그에 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조야(粗野)한 수탈론을 담은 세 개의 문헌(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신용하 교수의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 토지 수탈과 쌀 수탈을 노골적으로 주장한 국사 교과서)을 내세워 그 허구성을 폭로하다가 슬쩍 식민지 경제 수탈이 없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비틀고 만다. 세 문헌의 오류를 지적하고 정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끝날 일을 사실상의 '수탈 부정론'으로까지 끌고 나갔으니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위의 세 문헌은 지금까지 나온 일제 강점기 농업사 연구를 전혀 대표하지 못한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에 관한 기존 연구성과 중에서 그처럼 노골적인 수탈론을 펼친 연구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연구는 일제의 식민지적·지주적 농업정책이 어떻게 식민지지주제 발달과 농민 몰락, 그리고 농업구조의 왜곡을 초래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아울러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겸병, 소작료 수탈, 그리고 미곡 대량 이출의 과정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분석했다.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분석의 중심을 차지한 셈이다.
나는 <오마이뉴스> 칼럼에서 <반일 종족주의> 곳곳에 부조적(浮彫的) 수법이 드러난다고 비판했는데, 토지 수탈론 비판과 쌀 수탈론 비판이 전형적인 사례이다(부조적 수법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 선택적으로 제시하거나 논파하기 용이한 견해만 검토하는 연구 방법을 가리킨다).
김낙년 교수는 내 칼럼에 대한 반론에서, 노골적인 약탈은 없었지만 제도와 정책을 통한 수탈이 있었다는 내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내가 국사 교과서의 서술과 별로 다르지 않은 변형된 수탈론을 펼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내 견해는 강제성의 개입을 입증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주장이라고도 했다. 내게는 그 강제성을 입증할 책임이 주어진 셈인데, 사실 이는 너무 쉬운 일이어서 김 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 할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농업정책에 관한 자료 중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대지주가 조선 농민들에게 얼마나 혹독한 강제를 가했는지 보여주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수와 조선총독부 도소작관(道小作官)을 지낸 히사마 겐이치(久間健一)의 진술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리라 믿는다. 그는 일제 당시부터 조선 농업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던 관변 학자인데, 그런 그가 아래와 같은 진술을 했으니 당시 실상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농민에게는 … 가장 극단적인 권력적 지도(指導)가 가해졌다. 이러한 권력적 개발은 일본인의 성급함이 작용했기 때문에 농민의 이해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으며, 고려할 여유도 없었다. 농민은 오로지 관청의 지도가 명하는 대로, 배급받는 종자를, 지시받은 못자리에 뿌리고, 주어진 못줄로 정조식(正條植)을 행하고, 정해진 날에 비료를 주고, 제초를 행하고, 명령받은 날에 피를 뽑고, 예취(刈取)를 하고, 지시받은 방법에 따라 건조·조제를 행할 뿐이었다. 거기에는 오로지 감시와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만일 다른 게 있다고 하더라도 농민의 창의와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久間健一, 1943, p.8)
히사마 겐이치의 책에는 일본인 대지주의 농민 지배가 어느 정도로 가혹했는지, 또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지주-소작 관계란 기본적으로 토지 임대차를 둘러싼 자유 계약 관계임을 감안할 때, 일본인 대지주들이 소작농의 경영상 자율성을 무시하고 물샐 틈 없는 강제 장치로 소작농을 통제하며 가능한 한 많은 소작료를 뽑아내려 한 것은 명백히 지주-소작 관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짓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작료 수탈이었다.
뉴라이트의 대부이자 <반일 종족주의> 필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조차 "식민지기의 지주-소작관계는 법률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였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소작농들에게 농노적 예속을 강요하는 불평등 관계였습니다."(안병직·이영훈, 2007, p.156)라고 했음에 비추어, 강제성의 개입을 애써 부정하려는 김 교수의 시도는 이장폐천(以掌蔽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다)의 느낌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