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북서부 시골 길가의 아이들
최늘샘
"이 기계에 지문 안 찍어도 되나요?"
"지금 컴퓨터를 켤 수가 없어. 또 정전이거든. 언제 전기가 들어올지 몰라. 그냥 가."
국경 통제소의 정전 덕에 간단히 도장만 받고 에티오피아에 들어섰다. 이곳에는 식용유가 귀한 걸까.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감자나 토마토로 가득 찬 자루를 메고 수단에 가더니 커다란 식용유통을 가져왔다.
수단 국경에서부터 반갑게 맞이하며 에티오피아 국경 마을까지 따라 붙어 이것저것 필요 없는 조언을 하던 이는 염려했던 대로 호객꾼이었다. 정류장의 미니버스에 오르자 친절했던 표정을 싹 바꾸며 200비르(한화 8000원)를 요구했다.
미안하지만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계속 따라와 놓고 결국 돈을 달라니, 나라별 국경별로 사기 수법은 참 다양하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수단 돈과 에티오피아 돈 25비르(1000원)를 줬는데, 너무 적다며 수단 지폐를 찢어 버렸다.
거대한 아프리카 땅에서 제국주의 식민지를 겪지 않은 유일한 나라, '동아프리카의 뿔'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나라,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설렘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붉은 바다 홍해를 건너 예맨에서 온 사업가 아흐메드(Ahmed)씨와 함께,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가는 중간 지점, 호수의 도시 바히르다르로 가는 미니버스를 탔다. 짐칸을 없애고 좌석을 최대로 늘린 승합차였다. 세 명이 앉을 좌석에 네 명을 태우고 다섯 명까지 밀어넣어도, 어느 누구 하나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꼼짝달싹 못한 채로 열두 시간을 이동했다. 허리와 무릎을 펼 수 없어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컴컴한 시루 속에 다닥다닥 붙은 콩나물이 된 기분, 움직일 수 없는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에티오피아 장거리 미니버스에 비하면 과테말라의 치킨버스는 널찍한 편이었고, 브라질과 터키에서의 스물일곱 시간, 서른여섯 시간 거리 대형버스도 그럭저럭 탈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렬한 고통도 까마득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곤 하는 것일까.
아흐메드씨는 아픔을 잊기 위해서인지 끊임없이 '까트(Khat)'라는 토종 식물을 씹었다. 까트는 에티오피아와 예맨 등지에서 널리 즐기는 식물로, 남미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흔히 먹는 코카잎처럼 환각 효과가 있다고 한다. 질겅질겅, 그는 끊임없이 옆자리 승객들에게도 까트를 권했지만, 나에게 까트 잎사귀는 아무런 치유와 안정의 효과가 없었다.
아프리카 대륙은 크게 지리적, 문화적으로 사하라 사막 이북과 이남으로 나뉜다. 이집트, 수단의 기나긴 사막 지대가 끝나고 드디어 에티오피아의 고산지대가 펼쳐졌다. '아마도' 세계 최고 밀도의 승합차가 오르락 내리락 산길을 빙빙 도니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멀미까지 찾아왔다. 한 사람 두 사람, 차장에게 봉지를 받아 토하기 시작했다.
우기답게 종일 폭우도 쏟아져, 버스 지붕에 묶어둔 배낭이 쫄딱 다 젖었다. 일 년 넘게 여행하며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불현듯 고국의 정겹고 편안한 집이, 따듯한 가족과 친구들이, 못내 그리웠다. 하지만 곧, 나에게는 돌아갈 옥탑방이 사라졌고 친지들이 늘 따듯한 건 아니라는, 조금은 슬프고 아릿한 사실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에티오피아 사람들 대부분은 평생 이런 힘겨운 버스를 타고 다닐 것이며, 불편함의 기준도 다르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색다른 고통 또한 '여행의 맛'이며 세계 곳곳 다양한 사회 문화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공포의 에티오피아 초고밀도 미니버스는 하루에 두어 시간 이상은 절대 다시 타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